맹자는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은 산업을 담당하는 사람과 역할이 다르며, 성인이자 군주인 사람은 백성들을 위해 輔佐(보좌)의 인물을 구하려고 근심했다고 환기시켰다. 이어서 맹자는 군주로서 지녀야 할 덕목으로 惠와 忠과 仁을 제시하되, 세 덕목의 우열을 가리자면 仁이 가장 중요하다고 암시했다.
주자(주희)는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은 小惠일 따름이며, 사람들에게 善을 가르치는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실질이 있지만 역시 한계가 있어 영구하기 어렵다고 했다. 주자는 堯(요)임금이 舜(순)을 얻고 순임금이 禹(우)와 皐陶(고요)를 얻은 것처럼 천하를 위해 사람을 얻는 것은 그 恩惠(은혜)가 광대하고 敎化(교화)가 무궁하다고 강조했다. 곧, 보좌의 인물을 구하여 천하를 올바르게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백성을 사랑하는 최선의 정책이라고 본 것이다. 得人은 만민을 위해 훌륭한 인물을 발견하여 起用(기용)하는 것을 말한다.
앞서 말했듯이 한문 고전의 정치론은 用人論(용인론)으로 귀결한다. 훌륭한 인물을 찾아내어 그를 適材適所(적재적소)에 쓴다면 정치는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사상이다. 당나라 태종은 자기 형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인물이고, 만년에는 고구려를 침공하느라 국력을 소비했다. 하지만 그의 정치를 貞觀之治(정관지치)라고 하여 칭송하는 것은 그가 인재를 잘 등용했기 때문이다. 정관은 당 태종의 年號(연호)이다.
당 태종은 643년에 훈신 24명의 초상화를 그려서 凌煙閣(능연각)에 걸어 놓게 했다. 그 훈신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 魏徵(위징)이다. 위징은 수나라 말에 당나라 고조에게 귀순해서 고조의 장남 이건성의 측근이 되었다. 하지만 황태자 이건성은 그 아우 이세민(훗날의 태종)과 경쟁하다가 패했다. 그렇지만 당 태종은 위징을 간의대부에 임명했다. 위징은 200여 차례에 걸쳐 상소문을 올려 성현의 정치를 역설했다. 위징이 죽은 후 태종은 一鑑(일감·하나의 거울)을 잃었다고 탄식했다. 오늘날의 정치가들 가운데 과연 누가 ‘거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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