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항변할 말을 찾는 것조차 귀찮다. 등급분류 신청된 게임을 검토하는 것이 그의 일.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저 게임을 하며 ‘노는 것’으로 비치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즐길 만큼 게임을 할 여유도 없어요. 좋은 점이 있다면 아직 시중에 나오지 않은 게임을 먼저 해 볼 수 있다는 것 정도요?”
게임물등급위원회 전문위원실 왕상호 실장(46)이 말했다.
○ 게임 설명서부터 꼼꼼하게
박동범 선임위원(39)이 컴퓨터를 켜고 시스템에 접속했다. 그에게 배당된 게임 목록이 화면에 떠올랐다. 게임 제목을 클릭하자 접수일부터 시작해 해당 게임과 관련된 사항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보통 하루에 2, 3개의 게임을 함께 검토해요. 여기에다 ‘내용수정 신고’도 한 사람당 하루 10건 이상씩 들어오죠.”
내용수정 신고는 이미 등급분류를 받은 게임물의 내용이 바뀌었을 경우 그 변경 사항을 게임물등급위원회에 신고하도록 한 제도. 게임 속 아이템을 하나만 추가해도 신고를 해야 한다. 연말연시를 비롯해 방학 시즌, 밸런타인데이 등 특정 기념일에는 내용수정 신고가 홍수처럼 쏟아진다. 게임회사들이 너도나도 기념 이벤트를 벌이기 때문이다. 간혹 이벤트에서 내건 경품들이 아파트나 자동차 등 과도한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공정거래위원회에 경품 고시 위반 여부도 질의해야 한다.
박 위원이 게임개발업체가 등급분류 신청을 할 때 첨부한 게임설명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일단 새로운 게임을 배정받으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다. 설명서를 훑어보며 폭력성과 관련해 체크가 안 된 부분이 있는지, 결제 한도가 제대로 표시되어 있는지 등 미흡한 부분을 찾는다. 설명서와 함께 업로드돼 있는 동영상도 열어봤다. 광선을 쏘아대는 우주선이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자료 보완 요청을 하죠. 특히 동영상 같은 경우는 폭력성, 선정성, 사행성, 약물 등이 포함되어 있는 장면들은 반드시 담아서 보내 달라고 다시 한 번 요청을 해요.”
나중에 게임개발업체에서 관련 자료를 고의로 숨긴 것이 드러나면 바로 등급이 취소된다.
자료 보완이 끝나면 그때부터 직접 게임을 해 보며 게임개발업체에서 신청한 등급이 연령에 맞는지 검토한다. 기존 등급분류 사례도 찾아보고, 외국 사례와 관련 연구결과도 살펴본다. 판단이 애매한 경우에는 아케이드 분과(오락실용 게임을 다룸)를 제외한 8명의 전문위원이 모여 토론을 해 표결에 부치기도 한다. 이를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가 등급위원회 심의회의에 올라가고, 학계 법조계 게임업계 청소년단체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등급위원들이 최종적으로 해당 게임의 등급을 결정한다.
게임설명서와 동영상을 검토한 박 위원은 게임개발업체에서 발행한 선불카드로 아이템 구매에 나선다. 이런저런 아이템들을 모으고, ‘온라인 머니’를 충전하면서 30만 원이 넘게 결제가 되는지 확인한다. 고스톱, 포커 등을 포함한 온라인 게임은 보통 성인 한 명당 월 30만 원, 롤플레잉게임(RPG) 같은 경우에는 성인 1인당 월 50만 원 수준이 등급분류의 기준이 되고 있다.
그는 “예전에는 업체들이 등급을 낮게 받으려고 노력했는데, 최근에는 높게 받으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0시부터 오전 6시까지 16세 미만 청소년의 일부 인터넷 게임 사용을 제한하는 셧다운제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업체들이 셧다운제 시행을 위한 시스템 설계와 구축 비용을 부담스러워해서란다.) 요즘엔 ‘15세 이용가’ 수준의 게임들도 ‘청소년 이용불가’로 등급을 신청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 등급 거부에 쏟아지는 섬뜩한 협박들
“‘퇴근할 때 조심해라’는 말을 제일 많이 듣죠.”
김유석 선임위원(42)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옆에는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락실용 아케이드 게임기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아케이드 분과의 팀장을 맡고 있는 그의 말이 계속됐다.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집으로 전화를 하는 사람도 있어요. 등급 거부를 받은 업체 담당자들이 협박을 하는 거죠. 면담 나갔을 때는 은근히 정치권 인사 이름을 대는 경우도 있죠. 그러면 나올 때 ‘유명한 분께 누가 안 되도록 더 꼼꼼히 보겠습니다’ 하고 나오죠.(웃음)”
‘내일 아침에 한강 위에 둥둥 떠다니고 싶냐’는 섬뜩한 협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문위원 몸에 시너를 뿌리는 이도 있었고, 인분을 자신의 몸에 들이붓고 민원실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다이야기’ 이후 아직도 ‘한 방’을 노리는 업자들에게 등급 거부는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2011년 등급분류를 신청한 게임물은 총 5108건. 이 중 584건이 등급분류 거부 판정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81%에 이르는 474건이 아케이드 게임물이었다.
빼곡히 들어찬 게임기는 대부분 ‘바다이야기’와 비슷한 것들이었다. 김 위원은 “‘전체 이용가’로 등급 신청을 하더라도 대부분 불법 게임기로 쉽게 개·변조가 가능하다. 하지만 정확한 사유가 없는 한 ‘예측’만 가지고 등급분류를 할 수도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업체들이 등급분류 신청을 할 때 흔히 ‘예비군’이라고 부르는 게임도 함께 신청하는 사례도 있다”고 덧붙였다. 등급 취소를 받았을 때를 대비해 원본과 유사하지만 조금 다른 게임도 함께 신청을 해서 미리 등급분류를 받아놓고 영업을 하는 것이다. 또 등급분류 거부 사유에 해당하는 콘텐츠를 사운드 파일이나 이미지 파일 등에 숨겨 놓고 등급분류를 신청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업체들은 등급분류 결정 후 숨겨둔 콘텐츠를 활성화시켜 불법적으로 영업을 해놓고, 나중에 이미 다 심의를 받은 사항이라며 오히려 항의를 한다. 너희들 실수를 인정해 줄 테니 보상으로 또 다른 게임물의 등급분류를 내달라고 ‘협상’을 걸어오기도 한다.
○ 그들의 등급분류 기준
그렇다면 게임의 등급분류는 어떤 기준으로 결정되는 것일까. 우선 폭력성. ‘전체 이용가’의 경우에는 선혈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야 하고, 무기도 만화적으로 장난스럽게 표현되어 있어야 한다. ‘12세 이용가’와 ‘15세 이용가’를 구분 짓는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적 표현 여부다. 일반적으로 비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면 12세, 신체 훼손이나 선혈 등이 사실적이지만 과도하지 않게 표현되어 있으면 15세로 판단한다. ‘청소년 이용불가’는 한눈에 봐도 잔인할 정도로 신체 훼손이 적나라한 경우 등에 해당한다.
선정성 판단도 폭력성의 경우와 대체로 비슷하다. 애정 표현이 등장하더라도 경미하고 만화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면 전체 이용가이고, 그보다 더 사실적으로 표현되는 경우 12세에 해당된다. 등장인물이 속옷 차림으로 나올 때는 15세, 실사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사실적인 신체 노출이나 성적 표현 등이 들어가 있으면 청소년 이용불가 판정을 받는다.
사행성과 관련해서는 유료 아이템을 이용자의 노력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지, 해당 아이템이 실제로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 등이 판단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게임을 하면서 ‘경험치’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임머니로 아이템을 구입할 수 있으면 전체 이용가이고, 현금과 바꾼 온라인 머니로만 구입이 가능하면 12세 이용가로 등급이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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