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말일까요. 남성과 여성 혹은 암수 구분이 있는 동물치고 아버지가 없을 수는 없는데요. 하지만 유인원(인간을 제외한 다른 영장류)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아버지’가 없습니다.
○ 고릴라와 침팬지의 번식 전략
고릴라 암컷들은 모두 비슷한 시기에 가임기를 맞습니다. 수컷은 이 기간 동안 다른 수컷이 암컷에게 접근하는 것만 막으면 짝짓기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수컷 고릴라들은 평소 치열하게 다퉈서 서열을 정해 둡니다. 암컷의 가임기에는 높은 서열을 차지한 수컷들만 암컷에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침팬지는 다릅니다. 각각의 암컷은 서로 다른 시기에 가임기에 들어갑니다. 임신 가능한 암컷이 365일 내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1년 내내 다른 수컷이 암컷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수컷 침팬지는 암컷들이 가능한 한 많은 수컷과 짝짓기를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둡니다. 대신 자신도 최대한 많은 암컷과 짝짓기를 합니다. 정자끼리 자유 경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번식 전략’의 차이는 고릴라와 침팬지의 암수 특징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릴라 수컷은 높은 서열을 차지하기 위해 힘을 키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몸집과 두개골, 송곳니가 대단히 커졌습니다. 침팬지 수컷은 정자의 양을 늘리는 방향으로 진화했습니다. 침팬지는 암수의 몸집과 송곳니 크기 차이가 고릴라보다 작은 대신, 유인원 중 몸집에 비해 고환이 가장 큽니다.
일단 짝짓기가 끝나고 새끼가 생기고 나면, 암컷 침팬지의 몸속에서 어떤 수컷의 정자가 선택됐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고릴라도 서열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번식(자신의 정자에 의한 난자의 수정)에 성공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인원 수컷은 태어난 새끼의 양육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많은 새끼를 만드는 일에만 ‘올인’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의 ‘아버지’는 없는 셈입니다. ○ 성과 먹을거리를 매개로 생긴 핵가족?
하지만 인류는 다릅니다. 고릴라처럼 몸집이 크지도 않고, 침팬지처럼 고환이 크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전혀 다른 전략을 개발했습니다. 바로 ‘함께 새끼 키우기’입니다.
최초의 인류를 생각해 봅시다. 여성은 임신 혹은 수유 중일 때 이동이 쉽지 않습니다. 또 인간의 아이는 다른 영장류의 새끼에 비해 상당히 더디게 자랍니다. 여성들은 주로 좁은 지역을 돌며 식물성 먹을거리를 수집해야 했습니다.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려면 양질의 단백질이 필요합니다. 남자들이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냥한 고기를 주고 가임기 여자의 환심을 살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더불어 여자와 ‘자기 아이’에게 먹을거리를 나눠 주는 일은 자손을 남기기는 데 무척이나 유익합니다. 여자에겐 남자가 계속 고기를 가지고 오게 하는 게 이익입니다. 하지만 가임기는 기껏해야 한달에 하루 이틀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내놓은 전략이 ‘위장’입니다. 자신이 항상 가임기인 것처럼 속여 계속해서 고기를 공급받는 것이죠. 여성은 스스로도 가임기를 잘 모르게 진화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든지 성교를 하게 됐고, 남자는 계속 같은 여자에게 되돌아오게 됐습니다.
이렇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성(性)과 먹을거리를 매개로 짝을 맺게 되자 성별 분업과 핵가족이 ‘패키지’로 등장했고, 이것이 인간의 기원이라는 주장은 ‘러브조이 학설’로 불립니다. 오언 러브조이 미국 켄트대 사회·인류학과 교수가 1981년 미국의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발표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아버지’의 탄생
이전에 사람들은 핵가족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러브조이의 말이 맞는다면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고, 남자는 밖에 나가 돈을 벌어 오고 여자가 그 돈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은 태초부터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운명이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여기서 말을 조금만 바꾸면, 여자는 수백만 년 전부터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성을 제공했다는 뜻으로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러브조이의 가설이 인류의 기원에 대한 학설이 아니라, 무한한 성생활을 꿈꾸는 남성들의 환상일 뿐이라고 혹독하게 비난했습니다.
러브조이 학설이 등장한 이후 최근 30년 동안, 그의 주장과 배치되는 새로운 자료가 계속해서 등장했습니다. 먼저 가임기에 상관없이 성생활을 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징이 아닙니다. 멀리는 돌고래, 그리고 인간과 가장 가까운 보노보(침팬지 속의 영장류) 역시 연중 언제나 성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핵가족이 없습니다.
또 러브조이의 설명과 달리 인간의 가임기는 완전히 숨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들은 알게 모르게 가임기 때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며, 이에 대한 남자들의 반응도 보통 때와 달라집니다. 배란기의 여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식욕이 줄어들며, 남녀 어느 쪽이 보기에도 예쁜 옷을 입습니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배란기 여자의 냄새에 끌리고 그 근처에 가면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을 분비합니다.
남자들은 아버지 노릇을 하면서 정성과 사랑, 시간과 물질을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러브조이의 학설이 맞는다면 이것은 오로지 자식이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 남자 역시 고릴라나 침팬지와 마찬가지로 아이가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정확히 알 방법이 없습니다. 물론 최근에 유전자 검사법이 개발되긴 했지만, 대부분은 친자로 그냥 믿습니다. 재혼한 부인이 데려온 아이나, 입양한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버지도 많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아버지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닌, 문화적인 개념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오늘날 러브조이 학설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수컷과 암컷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물학을 넘어선 사회문화적인 존재입니다. ‘아버지’의 탄생이 그 증거입니다.
이상희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인류학과 교수 sang-hee.lee@ucr.edu 정리=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