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새터 땐 맥주 쏘고… PC방서 수강신청… ‘사모님’ 애칭 얻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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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3일 03시 00분


안목단 씨의 새내기 생활

나이는 다른 학생들의 부모들보다 많다. 하지만 열정만큼은 손자보다 어린 신입생들을 능가한다. 70년이 넘는 오랜 기다림. 안목단 할머니(앞줄 가운데)가 지난달 29일 오전
경북 경산시 영남대 노천강당에서 열린 입학식에서 다른 신입생들과 얘기를 나누며 즐거워하고 있다. 경산=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나이는 다른 학생들의 부모들보다 많다. 하지만 열정만큼은 손자보다 어린 신입생들을 능가한다. 70년이 넘는 오랜 기다림. 안목단 할머니(앞줄 가운데)가 지난달 29일 오전 경북 경산시 영남대 노천강당에서 열린 입학식에서 다른 신입생들과 얘기를 나누며 즐거워하고 있다. 경산=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지난달 29일 낮 12시 50분, 영남대 인근의 한 PC방.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PC방을 가득 채운 새내기들의 표정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마우스 위에 얹은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곧 있을 ‘전투’에 대비해 예행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이윽고 오후 1시 정각. PC방 곳곳에서 ‘탁탁’ 하는 클릭 소리가 총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몇 분 뒤 환호성과 탄식이 교차했다. “‘올킬’(원하는 과목 모두 수강신청을 했다는 뜻)했다”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 학생, “한 과목 놓쳤다”면서 울상을 짓는 학생….

그 사이로 한 할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PC 앞에 선 할머니는 이마의 땀을 닦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 첫 단추는 잘 꿰었네요.”

○ 할머니의 ‘수강신청 대작전’


주인공은 안목단 할머니(78). 영남대 국어국문학과 만학도 수시 전형에 입학한 할머니는 이날 입학식 직후 수강신청을 위해 손자보다 어린 신입생들과 함께 PC방을 찾았다.

‘수강신청’이란 단어 자체가 생소했던 안 할머니에게 온라인으로 진행된 수강신청 과정은 힘들 수밖에 없을 터. 고민 끝에 그는 ‘선배님’에게 지원 요청을 했고, 학과 대표 최정영 씨(23)가 멘토 역할을 맡았다. 최 씨는 수강신청 며칠 전 할머니와 상의해 시간표를 짰다. 자서전을 쓰고 싶다는 할머니의 생각을 반영해 ‘고급 맞춤형 글쓰기’를 넣고, 현직 사업가라는 점을 고려해 ‘여성과 리더십’ 과목도 포함했다.

이제 남은 건 수강신청. 인기 과목의 경우 몇 초 안에 정원이 차기에 얼마나 빨리 신청하느냐가 생명이었다. 수강신청 사이트 접속과 과목 신청은 최 씨가 대신 했다. 안 할머니는 처음부터 끝까지 최 씨 옆에서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메모지에 수강신청 방법을 열심히 적었다. “처음이라 이렇게 신세를 지지만 다음 학기부턴 혼자 해야 하지 않겠어요? 혼자 여러 번 연습까지 해봤지만 생각만큼 잘되지가 않아 선배님에게 부탁을 했어요.”

최 씨의 ‘노련함’과 안 할머니의 응원 덕분에 수강신청 작전은 대성공. “몇 초가 몇 시간 같았다”면서 가슴을 쓸어내린 안 할머니는 자리를 떠나는 순간까지 최 씨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안 할머니는 항상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배가 고팠다. 인생 역정을 한 권의 책에 담아보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배워 보고 싶었다. 영남대에 만학도 전형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뒤 주저 없이 지원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물론 자식들은 그런 할머니를 말렸다. 평생 열심히 사셨는데 이젠 편하게 여행이라도 다니시라고 했다. 하지만 안 할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난 원래 뭐라도 부지런히 해야 건강한 체질”이라면서 “어린 학생들을 보니 30년은 젊어진 것 같다”며 웃었다.

교정에 서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수시전형 지원서를 내고 얼마 뒤, 대학 측 관계자가 그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고령의 나이에 학교를 다닐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관계자는 사무실에서 두 번 놀랐다. 팔십 가까운 노인 같지 않은 외모에 한 번, 그의 엄청난 열정에 또 한 번 놀란 것이었다.

며칠 뒤 치러진 면접시험. 호탕한 웃음소리에 에너지까지 넘치는 안 할머니 덕분에 면접장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시험은 시험이었다. 그보다 ‘어린’ 교수들의 질문에 열심히 대답하고, 맞춤법 문제까지 잘 풀었지만 면접장을 나올 땐 뭔지 모를 아쉬움과 허탈함에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 할머니는 ‘스타’

합격자 발표 시기가 가까워질수록 안 할머니의 신경은 날카로워졌다. 면접장을 나설 당시 한 교수가 “마지막으로 할 말 없느냐”고 물었을 때 “꼭 합격시켜 달라”고 매달리지 않은 게 후회가 됐다.

떨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해진 그는 어느 날 인근 바닷가로 훌쩍 떠났다. 그러던 중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회사 직원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합격하셨습니다.”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눈물이 쏟아졌지만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영화 필름처럼 머리를 스쳐갈 뿐이었다.

합격한 뒤엔 바쁜 일과 중에도 모든 학교 행사에 빠짐없이 나갔다. “어릴 때부터 대학에 한번 가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70년을 기다렸는데 대충 다닐 수 있나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는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갔다. 사극에서나 봤을 법한 한복 때문일까. “같이 공부하러 오신 분”이라는 학교 관계자의 설명에도 어린 학생들에겐 안 할머니가 어렵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안 할머니 특유의 편안하고 시원한 성격이 이내 학생들의 마음을 열었다. 같은 과 신입생 정아희 씨(19·여)는 “친구들 모두 할머니를 이젠 ‘사모님’이라고 부른다”면서 “처음엔 함께 수업을 듣는 게 신기했지만 지금은 그냥 친할머니처럼 편하고 좋다”고 말했다.

얼마 뒤 2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된 새내기 배움터(새터). 안 할머니는 이미 인기스타였다. 새터 둘째 날 안 할머니가 도착하자 학생들은 열광했다. 그냥 할머니가 좋아서이기도 했지만 할머니 손에 들린 맥주 5박스와 술안주 때문이기도 했다. 같은 과 조수환 씨(23)는 “할머니를 보면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행복한 표정을 보고, 들뜬 목소리를 듣다 보면 이렇게 젊은 나이에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도 감사하단 생각이 들어요.”

입학식이 끝난 뒤 넓은 교정을 조용히 거닐던 안 할머니는 “만날 지금처럼 돌아다니면 살이 쭉쭉 빠지겠다”면서 한숨을 쉬었다. 또 “학기가 시작되면 길 잃어버리지 않게 다른 학생들만 졸졸 따라다녀야겠다”며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놨다. 물론 그러면서도 행복한 표정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힘든 공부에 대한 걱정은 없을까. 넌지시 물었더니 미소와 함께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공부야 밤을 새워서라도 하면 되죠. 이왕 시작한 거 10년쯤 잡고 석사하고 박사 학위까지 딸 생각입니다. 근데 그때까지 살 수 있을지 그거 하나가 걱정이네요.”

경산=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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