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슈]심심찮은 항공기 기내난동 실태 들여다보니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3일 03시 00분


심심찮은 항공기 기내난동 실태 들여다보니… 착륙國 법따라 처리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e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enkeey@donga.com
#1 1월 28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인천으로 가던 A사 소속 항공기. 터키인 E 씨가 와인을 요청했다. 한 잔, 두 잔, 세 잔. 그의 얼굴에는 이미 취기가 돌고 있었다. 안전을 우려한 승무원은 E 씨의 네 번째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더 큰 소란을 야기했다. E 씨가 아예 면세점에서 구입한 술을 꺼내 마신 것. 술에 취한 채 큰소리로 떠들던 그는 승무원들의 자제 요청에 화가 난 나머지 옆 좌석의 개인용 TV를 손으로 쳐 액정화면을 부쉈다. 그는 항공기가 착륙한 뒤 곧바로 인천국제공항경찰대에 인계됐다. E 씨는 “술에 취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발뺌했지만, 결국 항공사 측에 5000달러를 배상하기로 합의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세속국가를 지향하는 터키에서는 다른 이슬람국가에서보다 음주가 자유로운 편이다).

#2 지난해 10월 27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출발해 인천으로 향한 B사 항공기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한국인 남성 J 씨가 옆 좌석의 일본인 여성 가슴에 얼굴을 들이미는 장면을 승무원이 목격한 것이었다. 승무원이 행동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오히려 “잘못한 게 없다”며 크게 화를 냈다. 일본인 여성도 강한 불쾌감을 표시하고 있었고, 주변 승객들도 “계속 성희롱 행위를 했다”고 증언했지만 J 씨는 안하무인격이었다. 피해자의 좌석을 다른 곳으로 옮긴 뒤부터 J 씨는 담당 승무원에게 폭언을 퍼붓기 시작했다. 항공기가 착륙한 뒤 J 씨를 반긴 것은 사랑하는 가족이 아닌 공항경찰대 수사과 소속 경찰관들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수십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일 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첫 신혼여행을 떠나는 여정일 수도 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유학길에 오른 학생도 있을 것이며, 몇 년간 아끼고 아낀 돈으로 자식을 만나러 가는 부모도 함께 탔을 수 있다. 항공기에는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몸을 싣는다.

그러나 항공기가 한 번 땅을 지치고 떠나면, 그 안의 승객들은 짧게는 1시간에서 길게는 20시간이나 공중에 뜬 공동운명체가 된다. 그래서 비행 도중에는 누군가의 일탈행동이나 잠깐의 소란행위가 주는 공포감은 생각보다 크기 마련이다. 땅에 있을 때는 그냥 피해가면 그만이지만, 하늘에서는 그럴 수가 없으니 왠지 더 불안한 것이다. ‘행여 내게 해코지는 하지 않을까?’ ‘저 사람이 화를 못 참고 비행기 비상문을 열거나 하진 않겠지?’ 처음에는 불쾌감이 들지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점차 불안감이 증폭된다. 이것이 항공기에서 난동을 부린 사람에게 단순히 시끄럽게 한 죄, 물건을 부순 죄 등만 물어선 안 되는 이유다. 자의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긴 여정을 함께하게 된 수많은 공동운명체들을 불안에 떨게 한 죄가 가장 크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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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주 등 행태도 가지가지

지난해 5월 24일 제주발 김포행 항공기에서 출발 직전 “항공기 점검으로 5분가량 지연 출발하겠다”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때 40대 후반 C 씨의 ‘활약’이 시작된다. 그는 “왜 제때 출발하지 않느냐”며 큰소리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를 말리는 S 씨 일행에게는 “미친 것 아니냐”, “나는 바쁜데 당신은 한가하냐”는 등의 폭언을 돌려줬다. 급기야 S 씨 등과 몸싸움까지 벌인 C 씨. 결국 제주공항경찰대가 기내로 들어와 사태를 진정시켜야 했다. ‘5분’에 화가 난 C 씨 때문에 항공기 출발 시간은 1시간이나 지연됐다.

기내난동의 동기는 앞에 든 터키인 E 씨의 사례처럼 음주가 가장 많다. 지난해 10월 22일 싱가포르를 향해 인천을 막 출발한 항공기에서 일어난 사건도 그랬다. 러시아인 승객 D씨는 마치 항공기를 술집으로 착각한 듯했다. 탑승 때부터 술 냄새가 났던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위스키를 요구했다. 승무원들이 서비스하는 술을 병째 집으려 하기도 했다. 기내 면세품 중 술을 구입해서 마시겠다고 떼쓰던 그는 급기야 여 승무원의 팔을 잡고 가슴을 밀치는 등의 난동까지 부렸다. 2차 장소를 항공기로 선택한 그의 3차 장소는 아쉽게도 술을 주문할 수 없는 싱가포르의 창이국제공항경찰대 조사실이었다.

같은 해 4월 24일 미국 뉴욕발 인천행 항공편에서 일반석 승객 K 씨는 일등석 승객인 것처럼 행세하며 ‘갤리(승무원들의 작업 공간)’로 가서 위스키를 시켰다. 곱게 술만 마셨으면 될 것을 갤리에 머무르며 승무원들에게 시비까지 건 게 잘못이었다. 그는 자리로 쫓겨 간 뒤 식사 시간에 다시 술을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자존심이 상해서였을까. 홧김에 와인 잔을 쥔 채로 테이블을 내리친 뒤 다친 손을 치료해주는 승무원에게도 계속 욕설을 내뱉었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불구속 입건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기내에서 담배를 피우다 걸리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다. 지난해 5월 6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탑승한 러시아인 M 씨는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다 두 번이나 들켜 결국 인천국제공항경찰대에 인계됐다. 11월에는 제주에서 부산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30대 주부가 그 짧은 한 시간을 못 참고 담배를 피웠다가 벌금 300만 원을 물기도 했다. 항공사 승무원들에 따르면 기내에서 흡연하다 적발된 승객들은 보통 읍소형(한 번만 봐주세요), 부인형(절대 피우지 않았다), 배짱형(벌금이 얼마냐? 차라리 내고 피우겠다)으로 나뉜다.

대형항공사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국토해양부에 신고한 기내난동 건수는 △2008년 31건 △2009년 29건 △2010년 29건 △2011년 23건 등이다. 그러나 항공사 측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해 훈방 조치하는 경우와 저가항공사들까지 고려한다면 실제 기내난동 피해사례는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기내난동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난해 11월 블랙베리를 만든 캐나다 림(RIM)사의 두 임원은 출장차 탄 에어캐나다 항공기에서 술에 취한 채 난동을 부렸다 체포됐다. 당시 토론토를 출발해 중국 베이징으로 가던 비행기는 이들 때문에 밴쿠버에 비상 착륙해야 했다. 회사는 즉각 이들을 해고했고, 법원도 7만2000캐나다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 벌금 500만 원? 너무 약한 것 아냐?

소비자가 ‘왕’이란 말은 하늘에서도 통한다. 비싼 운임만큼 서비스의 질은 버스나 기차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소비자, 즉 승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항공안전 및 보안에 관한 법률’에 따라 기장(또는 기장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승무원)은 항공기가 이륙한 뒤 착륙할 때까지 사법경찰권을 갖기 때문이다.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원양어선의 선장도 같은 책임과 의무를 진다.

항공사 측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승무원들은 기내난동을 일으킨 자에게 먼저 구두로 경고하게 돼 있다. 2차적으로는 미리 준비해 둔 경고장을 제시하는데 이는 신체적 제약을 가하기 전의 ‘최후통첩’과 같다. 그래도 승객이 불법행위를 지속하면 기내에 있는 수갑이나 포승줄 등으로 신체를 구속한다. 최후 방편으로는 전기충격기나 테이저(작은 쇠 화살을 쏘아 상대의 신체에 맞힌 후 전기충격을 가하는 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

기내난동의 유형은 법률에 잘 구분돼 있다. 항공안전 및 보안에 관한 법률 내 ‘제23조 승객의 안전 유지 협조 의무’를 보면 승객들은 △폭언, 고성방가 등 소란행위 △흡연(흡연구역에서의 흡연은 제외) △술을 마시거나 약물을 복용하고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주는 행위 △다른 사람에게 성적(性的) 수치심을 일으키는 행위 △항공법 제71조의 2를 위반하여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행위 등을 해선 안 된다. 운항 중인 항공기에서 이를 어기면 500만 원(계류 중인 항공기의 경우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사안의 심각함에 비해 처벌규정이 너무 약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장의 승낙 없이 조종실 출입을 기도하는 행위를 했을 때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돼 있다.

기내에서 소란을 피운 사람들의 신병 처리는 도착국의 법령에 따르게 된다. 한국 사람도 뉴욕으로 가는 항공기에서 말썽을 부렸다면 뉴욕 현지법에 따라 처벌된다는 얘기다. 한국의 경우 공항에 상주하는 경찰들이 게이트 브리지(항공기와 공항 건물을 연결하는 임시다리) 앞에서 기다리다 난동자의 신병을 인계받는다. 현행범으로 체포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보통은 ‘임의동행’ 형식이다. 이들은 별도의 사무실(입국재심실)에서 입국심사를 받은 뒤 공항경찰대에서 조사를 받는다. 임영규 인천국제공항경찰대 수사3팀장은 “항공기 내부에는 폐쇄회로(CC)TV가 없기 때문에 승무원들이 주변 승객들의 목격자 진술서까지 미리 받아놓는다”며 “음주난동의 경우는 기억이 안 난다며 발뺌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본인이 잘못을 시인한다”고 말했다.

승무원들에게도 기내난동은 가장 큰 골칫거리다. 한 항공사 객실승무원은 “와인이든 위스키든 종류에 상관없이 3잔을 마시면 그 승객에 대한 정보를 일단 기내 전 승무원이 공유한다”며 “혹시 모를 상황에도 늘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항공사들은 기내난동 전력이 있는 사람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단 난동이 벌어지면 소란을 피운 사람을 설득하고 진정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머지 승객들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도 승무원들의 몫이다. 특히 여성이나 어린이들은 작은 소란에도 크게 놀랄 수 있어 승무원들이 난동자 주변에 앉은 승객들의 자리를 바꿔주기도 한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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