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K-패션,파리 명품쇼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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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9일 03시 00분


‘쿠론’ 핸드백, 한국 브랜드 첫 ‘방돔 럭셔리’ 초청 받아

프랑스 파리 방돔 광장 인근의 최고급 호텔 3곳에서 2일부터 5일까지 ‘방돔 럭셔리’ 트레이드쇼가 열렸다. 국내 업체 중에서는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의 핸드백 브랜드 ‘쿠론’이 유일하게 참여해 전 세계 명품 바이어들에게 ‘신고식’을 했다. 블루 오렌지 등 다양한 색상의 스테파니백(왼쪽)은 해외 바이어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프랑스 파리 방돔 광장 인근의 최고급 호텔 3곳에서 2일부터 5일까지 ‘방돔 럭셔리’ 트레이드쇼가 열렸다. 국내 업체 중에서는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의 핸드백 브랜드 ‘쿠론’이 유일하게 참여해 전 세계 명품 바이어들에게 ‘신고식’을 했다. 블루 오렌지 등 다양한 색상의 스테파니백(왼쪽)은 해외 바이어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3월의 프랑스 파리는 새침한 고양이 같았다.

‘파리 패션 위크’와 ‘프리미어 클래스’ 등 대형 패션행사가 겹치면서 파리시내 곳곳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패션 피플로 넘쳤다. 이들은 성지를 찾은 순례자처럼 파리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느라 바빴다.

그런데도 파리는 쌀쌀맞은 고양이처럼 한순간도 따사로운 햇볕을 선사하지 않은 채 차가운 빗줄기만 뿌렸다. 하지만 패션 순례자들은 음산한 날씨조차 “이것이 파리의 매력”이라며 짝사랑의 세레나데를 읊어댔다.

이들이 모인 패션 행사장에서도 쌀쌀한 바깥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파리 중심 방돔광장 주변에서도 전 세계에서 모여든 브랜드들이 남다른 열정을 뿜어내고 있었다. 파크하이엇, 호텔 르뫼리스, 호텔 데브뢰 등 광장 주변의 최고급 호텔 3곳에서는 2일부터 5일까지 ‘방돔 럭셔리’ 행사가 열렸다.

한국 패션의 힘

쿠론의 석정혜 이사(오른쪽)가 이탈리아에서 명품 멀티숍 ‘베르고티니’를 운영하는 조반니 라이놀리 사장과 수주 관련 상담을 하고 있다.
쿠론의 석정혜 이사(오른쪽)가 이탈리아에서 명품 멀티숍 ‘베르고티니’를 운영하는 조반니 라이놀리 사장과 수주 관련 상담을 하고 있다.
올해로 9년째, 횟수로는 17번째를 맞는 이 행사는 전 세계 곳곳의 고급 패션브랜드들이 고급 백화점, 멀티숍 등의 바이어에게 신제품과 새 트렌드를 소개하는 트레이드 쇼다. 이 쇼는 액세서리, 기성복, 이브닝웨어 등 3개 분야로 나뉘어 진행된다.

방돔 럭셔리는 기존의 ‘올드 럭셔리’ 브랜드들과 차별화되는 신규 브랜드들을 통해 ‘명품의 미래’를 보여주는 행사다. 그렇다 보니 전통적인 럭셔리에 비해 글로벌 인지도는 낮은 브랜드들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이 브랜드들의 품질이 전통적인 럭셔리에 비해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최고급 호텔에서 열리는 럭셔리 쇼답게 브랜드의 격도 까다롭게 따진다.

이번 ‘방돔 럭셔리’에 초대된 브랜드는 총 76개.

올해는 한국 업체의 브랜드도 처음으로 초청을 받았다.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의 핸드백 브랜드 ‘쿠론’이 그 주인공. 석정혜 디자이너(이사)가 2009년 론칭해 1년 만에 코오롱에 인수된 이 브랜드는 인수 이후에도 석 이사가 여전히 브랜드 전반을 진두지휘 하고 있다. 석 이사는 “지난해 12월 프랑스 라데팡스에서 열린 ‘코리아 브랜드 & 한류 상품 박람회’에 주요 제품을 선보였을 때 방돔 럭셔리 관계자들이 찾아와 쇼 참여를 권유했다”고 참가 배경을 설명했다.

이미 국내에선 전국 30개 백화점에 입점하며 ‘중견급’으로 성장한 이 브랜드는 성장세가 높은 브랜드 중 하나로 꼽힌다. 핸드백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현대인의 심리적 경향 때문에 소비성향이 가장 보수적으로 나타나는 고급 핸드백 카테고리에서, 순수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도 선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가격대에, 좋은 품질을 내세우는 쿠론은 글로벌 경제위기 때문에 소비 심리가 얼어붙은 글로벌 시장 분위기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3일 쿠론 부스를 찾은 이탈리아 바이어, 조반니 라이놀리 사장은 “명품 시장이 전 세계적으로 성숙하면서 최고의 부호들도 ‘가격 대비 품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며 “이들을 공략하기 위한 ‘어포더블 럭셔리’ 브랜드를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 라이놀리 사장은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주에 있는 최고급 호텔 ‘빌라데스테’ 등 코모 호 일대에서 고급 멀티숍 ‘베르고티니’ 6개를 운영하는 ‘큰손’이었다. 라이놀리 사장은 상담 후 소매가 기준으로 2억 원 상당의 가방을 망설임 없이 주문했다.

글·파리=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사진·파리= 위성환 포토그래퍼 wiecy@naver.com  
▼파리의 뉴 럭셔리 트렌드는 ‘창조적 영혼과 친절한 정신’▼

1 미국의 디자이너 브랜드 ‘본 홀자우젠’은 악어 꼬리 디자인을 살린 ‘퍼리 크로커다일 클러치’를 선보였다. 2 스페인 브랜드 ‘이네스 파가레도’가 선보인 해골 모양 핸드백은 레이디 가가에게 판매된 모델. 3 한국 입양아 출신 미국 디자이너 조이 그라이슨 디렉터는 여성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한 다양한 핸드백 라인을 소개했다. 4 터키 브랜드 ‘디레크 아니프’는 레이스 관련 노하우를 자랑하기 위해 쇼장에 아름다운 발레리나 스타일 드레스를 전시했다.
1 미국의 디자이너 브랜드 ‘본 홀자우젠’은 악어 꼬리 디자인을 살린 ‘퍼리 크로커다일 클러치’를 선보였다. 2 스페인 브랜드 ‘이네스 파가레도’가 선보인 해골 모양 핸드백은 레이디 가가에게 판매된 모델. 3 한국 입양아 출신 미국 디자이너 조이 그라이슨 디렉터는 여성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한 다양한 핸드백 라인을 소개했다. 4 터키 브랜드 ‘디레크 아니프’는 레이스 관련 노하우를 자랑하기 위해 쇼장에 아름다운 발레리나 스타일 드레스를 전시했다.

쿠론의 윤현주 디자인실장은 “이 멀티숍을 통해 쿠론이 구치 프라다 보테가베네타 등과 나란히 전시되며 최고급 소비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외국 바이어들 사이에서도 국내 베스트셀러인 ‘스테파니백’과 TV 드라마 ‘내조의 여왕’에서 탤런트 김남주가 들고 나와 유명해진 ‘재키백’, 부드러운 소재에 핸드백 안 양쪽 면에 모두 커다란 수납용 지퍼가 달린 ‘케이트백’의 인기가 높았다. 패션시장이 나날이 글로벌화하면서 소비자의 취향도 비슷해지는 것 같았다.

명품의 미래

방돔 럭셔리에는 다양한 디자인 분야에서 ‘내공’을 쌓은 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제 막 새 컬렉션을 선보이는 브랜드가 많았다. 마치 돌잔치에 나와 아기를 자랑하는 엄마들처럼, 디자이너의 ‘권위’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미국의 핸드백 브랜드 ‘그라이슨’ 부스에는 생김새에서 한국적인 인상이 강하게 풍기는 동양계 디자이너 조이 그라이슨 디렉터가 방문객을 반겼다. 아니나 다를까, 세 살 때 미국에 입양된 한국계 디자이너였다. ‘리즈클레이본’ ‘코치’ ‘캘빈클라인’ 등에서 경험을 쌓은 그는 ‘마크제이콥스’에서 스텔라백 등의 유명 핸드백 모델을 만든 주인공이었다. 참한 외모와 달리 나무 소재 잠금 장식과 상어가죽 등 이질적인 소재를 과감하게 접목한 솜씨가 돋보였다. 그라이슨이 선보이는 대중적인 라인인 ‘트라이베카’는 전체 판매액의 3%를, 사회단체 3곳에 기부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그라이슨 디렉터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입양 관련 단체에도 기부한다”고 말했다.

스페인 브랜드 ‘이네스 파가레도’는 방돔 럭셔리 내 브랜드 가운데서도 가장 ‘크레이지’한 디자인이 많았다. 가방 아래 네 모서리에 모두 발이 달려 가방을 내려놓으면 발이 ‘착지’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핸드백, 다이얼판이 달린 전화기 모양 핸드백, 해골과 손가락을 모티브로 한 디자인 등은 독특한 아이디어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치열이 삐뚤빼뚤한 이까지 생생하게 묘사된 해골 머리 모양 핸드백은 ‘역시나’ 레이디 가가가 사갔다고 했다. 동그란 흑인 어린이 얼굴에 금도금한 코가 달린 모양의 가방은 흑인 배우 윌 스미스의 어린 딸이 첫 고객이었다.

자동차 디자이너 출신인 비키 본 홀자우젠이 만든 핸드백 브랜드 ‘본 홀자우젠’은 디자이너의 백그라운드를 핸드백 디자인에 영리하게 녹였다. 디자이너는 아우디, 메르세데스벤츠 등에서 콘셉트카와 모터쇼용 차를 디자인했던 인물.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부가티 미니’백에도 최고급 자동차 부가티에서 영감을 받은 티타늄 소재 버클이 달려 있었다. 악어 꼬리 디자인을 살려 꼬리를 뚜껑처럼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게 디자인된 ‘퍼리 크로커다일 클러치’도 아이디어가 신선했다.

행사가 유서 깊은 고급 호텔들에서 열리다 보니 호텔의 인테리어 요소나 오래된 그림들이 자연스레 의상과 어우러져 부가가치를 높이는 듯했다. 열정 넘치는 브라질 브랜드답게 여성의 볼륨을 극대화한 드레스 브랜드 ‘파트리샤 보날디’, 레이스의 미학을 보여주는 발레리나 스타일 드레스로 바이어들의 눈길을 끈 터키 브랜드 ‘디레크 아니프’ 등이 돋보였다.

브랜드별 아이덴티티는 각기 달랐지만 메시지는 동일했다. 자만심을 버리고 최대한 ‘친절한’ 브랜드가 될 것, 다른 브랜드와 차별화되는 영혼을 담을 것. 콧대 높은 기존 명품들 사이에서, 이들이 진행하는 조용한 ‘민주화’가 시작됐다.

▼명품 시장, 최상급과 합리적 가격대로 양분▼

방돔 럭셔리쇼 운영 카롤 드보나 디렉터 평가

9년째 ‘방돔 럭셔리’를 운영해 온 카롤 드보나 디렉터는 명품 시장이 양분되면서 합리적인가격에 좋은 품질을 자랑하는 한국 브랜드의 성장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9년째 ‘방돔 럭셔리’를 운영해 온 카롤 드보나 디렉터는 명품 시장이 양분되면서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품질을 자랑하는 한국 브랜드의 성장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방돔 럭셔리 트레이드쇼를 운영 및 홍보하는 ‘스튜디오XXB’의 카롤 드보나 디렉터는 “전 세계 명품 시장은 ‘위버 럭셔리(최고급 명품)’와 ‘어포더블 럭셔리(합리적 가격대의 고급품)’로 굳어지는 양상”이라고 강조했다. 5일 여성 기성복을 판매하는 르뫼리스 호텔에서 만난 그는 “이런 점 때문에 재질이나 품질 대비 가격이 높게 책정된 브랜드 및 중간급 명품은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불쑥 자신의 이름 이니셜이 박힌 가방을 번쩍 들며 예를 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지난해 이맘때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인수해 화제가 된 ‘모아나’라는 브랜드의 핸드백입니다. 특히 프랑스인에게는 ‘명품’이라기보다는 질 좋은 고급품으로 인식되는 루이뷔통만으로는 최고급 소비자들을 공략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전략적으로 끌어들인 브랜드죠.”

에르메스 인수에 유독 욕심을 보였던 아르노 회장은 지난해 3월, 1849년 설립된 모아나를 인수하면서 브랜드 재정립 작업에 힘을 쏟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대 같은 과정을 통해 글로벌 브랜드가 된 루이뷔통의 후속작으로 이 브랜드를 ‘간택’하면서 LVMH그룹의 최고급 제품 포트폴리오를 더욱 강화하려는 전략이다.

모아나 역시 루이뷔통처럼 귀족들의 여행용 트렁크 제조사로 출발했다. 지난해 12월 문을 연 대형 플래그십 스토어도 생토노레에 위치한 에르메스 매장 인근에 자리 잡고 있다. 새 매장 바로 맞은편에는 또 다른 유명 명품 브랜드 ‘고야드’의 매장이 있다. 당시 현지 언론들은 ‘아르노 회장이 고야드와 에르메스를 경쟁자로 삼고 전략적으로 매장 위치를 정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드보나 디렉터는 “합리적인 가격대를 선보이는 질 좋은 제품의 수요가 경기 침체를 겪고 있는 유럽을 중심으로 많아지고 있다”며 ‘쿠론’ 같은 한국발 브랜드 역시 인기를 끌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혼자 외롭게 전투를 하는 게 쉽지 않은 만큼 비슷한 성격의 다른 한국 브랜드들도 꾸준히 소개돼야 성공할 수 있다”며 “특히 유명인과 주요 매체 등을 이용한 현지 마케팅에 주력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는 세계 주요국들이 경기 침체를 겪고 있는 현재 상황이 품질 디자인 감성 등 ‘기본기’가 탄탄한 신규 브랜드들이 급성장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변하는 소비자들의 추이를 잘 읽고 이들이 ‘이성’을 발휘해 구입했다가 점점 ‘감성적’으로 사랑에 빠지도록 해야 합니다.”

파리=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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