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우리 집안이 콩가루?”지효스님 벌떡 일어나 성철스님 향해 ‘염주 신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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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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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 스님(왼쪽)과 원택 스님이 7일 부산 범어사에서 아직 개화하지 않은 매화를 가리
키며 성철 스님에 얽힌 사연을 더듬고 있다. 부산=최재호 기자 choijh92@donga.com
무비 스님(왼쪽)과 원택 스님이 7일 부산 범어사에서 아직 개화하지 않은 매화를 가리 키며 성철 스님에 얽힌 사연을 더듬고 있다. 부산=최재호 기자 choijh92@donga.com
《 11일 탄생 100주년을 맞는 성철 스님(1912∼1993) 재조명 열기가 뜨겁다. 올해부터 입적 20주년이 되는 2013년까지 스님을 기리는 백일법문(百日法門)과 3000배 법회, 학술대회 등이 잇달아 열린다. 11일 오후 2시 서울 조계사에서는 기념 법회가 열리고, 31일부터 스님이 수행한 사찰을 순례하는 행사도 진행된다. 젊은 시절 성철 스님의 지도를 받았고 현재 당대 최고의 강사로 꼽히는 무비 스님(69)과 성철 스님 말년 20여 년을 시봉한 원택 스님(68)이 7일 부산 범어사에서 만나 생전의 성철 스님과 그 삶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무비 스님은 입적 뒤의 성철 스님을 처음으로 ‘국민선사’로 부르기도 했다. 성철 스님의 6번째 상좌인 원택 스님은 은사의 유지를 잇는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성철 스님 시봉일기’의 저자다. 》
○ “우리 집안(불교), 콩가루 집안이지”

1967년 해인총림 출범과 함께 방장으로 취임한 성철 스님은 특히 법문에 공을 들였다. 그해 100일에 걸친 백일법문에서 가장 질문이 많은 청중은 법정, 지관 스님이었다. 이듬해 동안거 때 성철 스님이 다시 육조단경에 관해 법문할 때의 일을 무비 스님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성철 스님은 불교 법맥이 조선 말기에 흐지부지됐다고 한 뒤 지눌 스님(1158∼1210)을 비판했다. 한 스님이 “우리 집안은 콩가루 집안이네요”라며 항의성 질문을 던지자 성철 스님은 “그래 콩가루 집안이야”라고 거침없이 대꾸했다. 이때 발끈한 지효 스님이 벌떡 일어나 “뭐, 콩가루 집안이라고” 하며 사형인 성철 스님을 향해 염주를 내리쳤다. 성철 스님은 사제의 갑작스러운 ‘염주 신공’을 재빨리 손으로 막았지만 긴 염주가 휘감기며 얼굴에 상처를 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무비 스님은 “당시에는 깨달음을 위해 생명을 걸고 공부하고, 지눌 스님은 물론이고 부처도 죽일 수 있다는 치열함이 가득했다”며 “청중은 잠시 뒤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 성철 스님의 법문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 “백골(白骨)이 만산(滿山)이야”

‘참선에 방해되니 책 보지 말라’는 성철 스님의 말은 불교계에서 오랫동안 시비에 휩싸였다. 나이 지긋한 스님들 사이에서 “(성)철 수좌는 책 많이 봐서 선사가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성철 스님은 독서광이었기 때문이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재조명되고 있는 성철스님. 동아일보DB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재조명되고 있는 성철스님. 동아일보DB
해인사 백련암에 있는 성철 스님 개인 서고인 장경각에는 불교는 물론이고 과학서적, 심지어 정음사·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까지 8000여 권의 책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무비 스님은 20대 시절 성철 스님의 말을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어 ‘노장’이 백련암에서 큰 절로 오면 모시는 시자 스님을 자처했다. “문학전집도 읽으셨냐”고 묻자 “조금 봤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성철 스님의 ‘조금 봤다’는 표현은 거의 달달 외운다는 의미라는 것이 정설이다. 원택 스님의 기억도 비슷하다. 책을 찾아오라고 할 때에는 ‘몇 번째 칸 몇 번째 줄의 몇 번째 책을 찾아오라’고 했다. 제목을 물으면 ‘니가 알겠나’ 하며 웃었다고 한다.

성철 스님의 책 보지 말라는 말은 오해라는 것이 무비 스님의 말이다. 해인총림 출범 이후 선방 분위기를 깰 수 없어 그런 것이지 상좌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자질에 맞게 공부할 수 있도록 계속 도왔다는 것이다. 실제 성철 스님 맏상좌인 천제 스님은 영어는 물론이고 일본어 범어에 능통하고, 둘째 만수 스님은 걸어 다니는 옥편이라고 할 정도로 한학에 밝다.

성철 스님은 수행과 공부를 제대로 하는 스님들이 없다며 곧잘 청중을 향해 일갈했다. “여기 쓸모없는 송장들만 있어, 백골(白骨)이 만산(滿山)이야.”

○ “내가 성철 스님과 ‘맞짱’ 떴다”


성철 스님은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 시절(1955∼1963년),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수행이 힘들어지자 주변에 철조망을 친 채 수행에 전념했다. 당시 수좌들의 꿈은 철조망을 뚫고 스님을 만나 불법을 논하는 것이었다. 이 시절, 당시 무술에 능하고 몸이 빠른 것으로 소문난 천장 스님이 성철 스님을 만났다고 주장해 화제가 됐다.

“천장 스님에게 직접 들은 얘기야. 다들 철조망을 넘고 싶었지만 노장이 동구불출(洞口不出·절문 밖을 나가지 않음)한 채 수행하는 데다 ‘호랑이’라 엄두를 못 냈어.(웃음) 성철 스님이 세상 뜨고 나니 공부를 열심히 해도 점검받을 분이 없더라고.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진 느낌이 들었어. 그래서 국민선사였다는 말을 저절로 하게 됐지.”(무비 스님)

○ “민주주의 장사하라네”


“곰 새끼들 내 죽고 나면 다 굶어죽을 놈들이야.”

상좌들이 공부를 게을리 할 때 걱정하던 성철 스님의 말이다. 원택 스님은 “세월이 지나 ‘백련암 곰 새끼’들이 잘 살고 있는 것은 은사가 몸소 보여준 가르침 덕분”이라고 했다. 성철 스님은 신도들에게 기도는 자신이 하는 것이라며 복을 빌어 달라는 불공을 거절했다. 당시의 신도들이 수십 년이 지나도 매년 4차례 백련암을 찾아 3000배를 하며 법회에 참여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성철 스님이 민주화운동 등 사회적 활동에 무관심했다는 비판도 있다. 전두환 정권 시절 여권 인사들이 드물게 스님을 찾아왔을 때의 일이다. 스님은 대뜸 이들을 향해 “(저쪽에서) 나보고 야당 노릇 해 달란다” “니들이 얼마나 못하면 나보고 ‘민주주의 장사’ 하라고 하냐”며 질타했다.

‘나를 보려면 3000배를 하라’는 스님의 말에도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절을 하면서 자신을 돌이켜 보라는 의미와 함께 권력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택 스님은 “은사는 ‘산승(山僧)은 청산(靑山)을 지킬 뿐이다’라며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에 철저했다. 만약 세속의 일에 개입했다면 불교를 넘어 국민적 어른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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