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희랍 비극이었다면 탈북자는 ‘저주받은 자’의 전형이다. 새로운 희망을 품고 목숨을 걸고 고향 땅을 탈출했다는 점에선 고전적 영웅의 풍모를 지녔건만 정착할 땅을 찾지 못해 만리타향을 유리걸식해야 한다는 점에서 천생 그러하다. 그들은 고향을 그리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설사 고향으로 돌아간다 해도 죽음보다 못한 탄압이 기다리고 있다.
천신만고 끝에 남한의 품에 안긴 탈북자라도 20년의 방랑 끝에 거지꼴로 고향 이타카에 돌아온 오디세우스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는다. 남한에 살지만 남한사람 대접도 못 받고 북한 출신이지만 북한사람임을 자처하기 힘들다.
하지만 희랍 비극의 ‘저주받은 자’들은 비범한 능력을 지녔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겪지 못할 운명을 타고났기에 남들보다 지혜나 용기가 뛰어나다. ‘인간 중에 가장 지혜로운 자’로 불렸던 오이디푸스가 그러하고 그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운명까지 꿰뚫어 보았던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그렇다.
연극 ‘목란언니’(김은성 작, 전인철 연출)의 주인공 조목란(정운선) 역시 그렇게 비범한 능력을 지닌 희랍 비극의 주인공을 닮았다. 연극의 표면만 보면 그는 볼품없는 탈북 여성에 불과하다. 평양 엘리트 예술가문 출신으로 군 복무 도중 밀수사건에 엮여서 부모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탈북했지만 남한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사기꾼 브로커에게 걸려 정착금과 임대아파트 보증금까지 모두 날린 그는 남한사회에 대한 환멸을 견디다 못해 다시 부모가 사는 북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재입북 자금 5000만 원을 마련하기 위해 이를 악문 목란은 산전수전 다 겪은 룸살롱 마담 조대자(황영희)의 집에 들어간다. 조대자에겐 세 자녀가 있다. 역사학자지만 실연의 아픔으로 우울증 환자가 된 첫째 아들 태산(윤상화), 철학과 교수지만 대학에서 철학과를 없애는 바람에 실업자가 된 둘째 아들 태강(안병식), 소설가지만 히트작이 없이 영화감독 애인의 시나리오 작업을 도와주는 막내딸 태양(연보라)이다. 눈치챘겠지만 이들은 남한사회에서 갈수록 지리멸렬해지고 있는 인문학을 대변한다.
목란의 비범함은 그 삼남매를 구원하는 데서 빛을 발한다. 태산의 우울증을 치유하고, 태강을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태양에겐 예술적 영감을 부여한다. 무엇을 통해? 조대자의 대사를 빌리면 ‘유신정권 이후 남한에선 씨가 말라버린’ 순수함을 통해서다. 연극에서 그 과정은 남한과 북한의 언어와 문화 차이에서 발생하는 유머와 아이러니의 연쇄폭발로 이뤄진다.
이는 자칫 북한사람은 남한사람에 비해 맑고 깨끗할 것이란 환상을 부채질할 수 있다. 하지만 연극은 목란의 가족을 제외한 북한사람들을 지독한 광신자 아니면 지독한 현실주의자로 형상화함으로써 이런 일반화의 오류에 함몰되지는 않는다.
목란의 순수함 역시 상당 부분 북한과 남한 사이에서 빚어지는 위치에너지에서 발원한다. 조대자의 투자 실패로 약속받았던 돈을 못 받게 된 목란이 표변하는 모습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망치를 휘두르며 그 돈을 쟁취한 목란은 과연 자신의 저주를 풀고 고향에 갈 수 있을까. 연극은 ‘저주 받은 자’가 왜 우리를 구원하는 ‘신성한 자’가 되는 것인지를 가슴 아프게 확인시키며 끝을 맺는다.
4면 객석 한복판에 위치시킨 다이아몬드 형태의 무대, 영화와 같은 빠른 장면 전환,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해학적 대사, 뮤지컬 배우 출신 정운선의 맛깔난 노래와 아코디언 연주를 곁들인 음악극적 요소로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두산아트센터가 기획한 경계인 시리즈 세 번째 작품. 4월 7일까지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1만∼3만 원. 02-708-5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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