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陳相(진상)이 스승을 배반하고 許行(허행)의 도를 배우는 것을 비판하였다. 곧, 맹자는 증자가 공자의 도덕을 한결같이 숭상한 것과 다르다고 진상을 비난하고 ‘시경’ ‘伐木(벌목)’편의 어구를 인용하여 학문이 진보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함을 우려하였다. 이번에는 ‘시경’의 ‘魯頌’편을 인용하여, 진상이 夷狄(이적)의 도로 나아갔다고 비판했다.
魯頌은 ‘시경’의 편명이다. 戎狄은 西戎(서융)과 北狄(북적)을 가리킨다. 膺은 擊(격)과 마찬가지로 ‘친다’는 뜻이다. 荊舒는 남방의 나라들이다. 荊은 楚(초)나라의 원래 이름이고, 舒는 초나라 가까이에 있었다는 나라의 이름이다. ‘戎狄是膺, 荊舒是懲’에 대해서는 교정청 언해본이나 주자학적 관점의 해설서는 모두 ‘융과 적을 치니 형과 서가 이에 징계되었다’라고 번역하거나 풀이한다. 주나라가 융과 적을 치자 형과 서가 저절로 징계되었다고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장으로 보면 ‘융과 적을 치고 형과 서도 징계하였다’라고 풀이하는 것이 타당하다. 膺과 懲은 정벌한 사실을 달리 표현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맹자는 ‘노송’편이 周公과 관련이 있다고 하였으나, 옛 주석에 따르면 이 시편은 주나라 僖公(희공)의 일을 다룬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맹자가 이 시편을 인용해서 주공의 일을 설명한 것은 斷章取義(단장취의)이다. 단장취의란 시편의 일부를 잘라 본래의 문맥과는 달리 인용자의 뜻에 맞게 어구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方且膺之는 戎狄이나 荊舒를 바야흐로 응징하였다는 뜻이다. 子是之學의 子는 陳相을 가리킨다. 是는 戎狄이나 荊舒를 가리킨다. ‘子學是’라는 문장에서 목적어 是를 강조하기 위해 앞으로 보내고 之를 써서 是를 다시 받았다. 亦爲不善變矣는 ‘아무래도 역시, 좋은 쪽으로 변화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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