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권자들은 투표할 때 후보자의 능력과 도덕성을 평가하고 찍기도 하지만 이념을 우선시해 투표하기도 한다. 올바른 이념을 가진 후보자를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결과에 실망할 때도 있다. 개인적 정의가 이념을 초월할 수 있을까?(ID: iamc****) 》
“이정표가 직접 길을 걸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지향하는 정치적 이념과 그것을 실현하는 정치인들의 능력이나 덕성이 일치하지 않을 때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이념적 잣대로 특정 후보를 선택했는데 정작 그 능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실망할 수도 있지만 뛰어난 역량을 보고 지지했던 정치인이 우리를 옳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 때 좌절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치적 이념을 따라야 할까, 아니면 정치적 역량만을 보아야 할까.
정치적 이념이 우리를 바람직한 사회로 이끌어 가는 길잡이라면 우리는 이 물음 자체에 커다란 물음표를 붙여야 한다. 그동안 좌우의 이념갈등에 짜증이 날 정도로 질린 사람들은 한국 정치문화가 적대적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빈곤해지고 황폐화되었다고 여긴다. 냉전체제의 종식과 함께 서구에서 유행했던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왜 우리에게 현실이 될 수 없느냐는 한탄도 들린다.
그렇지만 ‘이데올로기의 종말’ 역시 또 다른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밝혀진 지 오래이다. 자유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건강한 정치문화를 갖고 있는 서구에도 여전히 좌파와 우파는 존재한다. 나는 한국의 정치적 문화토양이 척박한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좌우 구별이 힘들기 때문이라고 본다. 좌파가 진보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 어떤 것인지, 보수적 우파가 무엇을 보수하겠다는 것인지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국민들이 어느 편에 서야 할지 헷갈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한국 정치가 방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방향을 제시하지 않고 사람들을 이끌 수는 없다. 정치적 이념들은 바로 이러한 방향들을 가리킨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화주의 공동체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는 모두 바람직한 미래사회의 방향을 말해주는 정치적 이정표들이다. 그것은 동시에 어떻게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이념 없이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눈먼 장님이 길을 안내하듯 맹목적이다. 반면 정의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이념은 내용이 없는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정치적 이념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길을 떠날 때 왼쪽으로 갈 것인지, 오른쪽으로 갈 것인지 이정표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 사람이 과연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역량과 덕성을 갖추었는지는 다음의 일이다. 붙박이 이정표를 함께 걸어갈 길잡이로 만드는 것은 바른 선택을 하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이진우 포스텍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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