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꿈의 공장,파리 패션위크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16일 03시 00분


■ 현장서 본 올 FW 패션 키워드

일주일간 계속된 파리 패션위크 마지막 날인 7일 오전.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뒷마당에서 열린 루이뷔통의 2012·2013년 가을·겨울(FW) 패션쇼장에서 런웨이에 깔린 철길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여행용 가방에서 시작된 브랜드 역사를 부각하기 위해 철길을 소품으로 활용했군….’

기자뿐만 아니라 각국에서 몰려든 많은 패션 저널리스트도 이런 생각이었는지 다들 무심히 철길을 지나쳐 갔다.

그리고 오전 10시 정각. 대형 시계가 매달린 천장 뒤로 거대한 문이 열렸다. 뒤 이어 자욱한 연기와 함께 경적이 울렸다. 쇼장에 모인 수백 명의 패션피플은 일제히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곧바로 환호성이 이어졌다.

기관차와 객실차 2개가 달린 실제 사이즈의 열차가 그 철길을 따라 들어온 것이다. 루이뷔통은 ‘육상 여행의 황금기였던 오리엔탈 익스프레스 시대의 영광을 재현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쇼보다 더 쇼 같은…

열차가 멈추고 경쾌한 음악이 흐르자 객실 안에 앉아 있던 모델들이 하나씩 열차 밖으로 걸어 나왔다. 키가 큰 모자로 자존심을 살린 부르주아 스타일의 여성들이 한 명씩 나오자 무대 안쪽에서 제복 차림의 남성들이 나타나 이들을 따랐다.

호텔 벨보이처럼 차려입은 이 남성들은 예년보다 한층 고급스럽고, 한층 거대해진 루이뷔통의 여행용 가방들을 두 팔 가득 들고 나왔다. 럭셔리 브랜드의 컬렉션에서 여성 모델이 1개 이상의 가방을 들고 나서기는 쉽지 않다. 지나치게 상업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방 들어주는 게 직업인 남성들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루이뷔통은 가방을 들지 않아 한결 손이 자유로워진 여성 모델을 통해선 옷의 디테일을 더 잘 보여줄 수 있게 하고, 가방은 남성을 통해 마음껏 선보이는 방식을 택했다. 이 영민한 연출에 대해 현지 언론은 “자본과, 아이디어와, 꿈의 승리”라고 전했다.

유럽과 미국의 불황에도 명품업계는 중국을 필두로 한 아시아 신흥 부자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이런 가운데 열린 2012·2013년 가을·겨울 패션쇼장에선 그래서 절망보다는 설렘이 더 커보였다.

4일 의대인 ‘유니버시테 피에르 에 마리 퀴리’에서 열린 겐조의 패션쇼는 여러 층에 걸친 대학 건물 내부 인테리어를 적극 활용한 연출이 돋보였다. 이 대학 건물은 마치 복도식 아파트처럼 복도를 따라 여러 개의 교실이 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각 층을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모델들은 꼭대기 층에서 출발해, 각 층의 복도마다 자리 잡고 앉은 관객 앞을 워킹한 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이동하는 동선으로 움직였다. 광장처럼 너른 1층 공간에서는 모든 모델이 한데 모여 ‘떼샷’을 연출했다.

▼가죽-파스텔-보랏빛 패션, 올 가을 겨울 열풍 예감▼

호랑이 프린트, 남미를 연상시키는 에스닉한 무늬…. 다양한 문화가 혼재된 듯한 ‘겐조’의 디자인 사령탑은 지난해 말 이 브랜드의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추대된 한국계 미국인 캐럴 림과 페루계 중국인 움베르토 레옹이 맡고 있다.

복도마다 뚫린 큰 창 테두리에 분홍 파랑 초록 등 다양한 색의 네온 조명을 설치한 이 쇼장에서는 하마터면 큰 사고가 날 뻔했다. 아래층을 내려다보느라 일부 관객이 난간을 디디는 바람에 전구가 깨지면서 그 조각이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부상자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패션쇼장에서 또 다른 ‘쇼’가 연출될 뻔했다.

트렌드포스트 제공
트렌드포스트 제공

보라색과 가죽, ‘잇’ 아이템


6일 그랑팔레에서 열린 샤넬 패션쇼에서 눈에 띄는 주조색은 보라색이었다. 빙판길처럼 연출한 크리스털 바닥, 커다란 보랏빛 자수정 기둥을 곳곳에 설치한 쇼장 분위기부터가 보랏빛 느낌이었다. 퍼와 가죽, 모직 소재를 능수능란하게 연출한 이 브랜드의 패션쇼에서는 특히 미니 숄더백을 메고 여성 모델의 손을 꼭 잡은 채 잰걸음으로 걸어 나온 사내아이가 관객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샤넬은 주력이 아닌 남성복과 아동복을 남성 또는 어린이 모델을 통해 매 시즌 ‘맛보기’처럼 선보여 왔다.

박은진 트렌드포스트 수석연구원은 “샤넬뿐만 아니라 여러 브랜드가 핵심 색상으로 보라색을 내세웠다”고 말했다. 진한 ‘울트라 바이올렛’부터 파란색이 조금 섞인 버전까지 여러 가지 다양한 보라색이 울, 새틴, 가죽 등 다양한 소재와 접합됐다.

연한 복숭아색, 하늘색 등 파스텔 색상을 여러 브랜드가 가을·겨울 색상으로 제시한 점도 눈에 띈다. 파리지엔 스타일을 온몸으로 구현하는 ‘클로에’와 여성스러운 이미지의 ‘스텔라 매카트니’가 이러한 색상을 적극 사용했다.

뉴욕, 런던에서 이어진 가죽 열풍은 파리에서도 이어졌다. 가죽 소재가 주로 쓰이는 재킷뿐만 아니라 원피스, 팬츠 등에 이르기까지 가죽의 변주가 다양하게 이뤄졌다. 특히 스페인 브랜드 ‘로에베’는 거의 모든 의상에 가죽 소재를 매치해 눈길을 끌었다. ‘유니버시테 파리 데카르트’에서 3일 열린 패션쇼에서 이 브랜드는 마치 면처럼 부드럽게 가공한 검은색 가죽으로 밀리터리 스타일의 가죽 케이프, 가죽 원피스 등을 빚어냈다. 다음 날 방문한 쇼룸에서는 단추와 깃 등의 디테일을 가죽 위에 조각처럼 새겨 넣은 솜씨도 감상할 수 있었다.

트렌드포스트 제공
트렌드포스트 제공

파리 컬렉션에서는 여성성을 극대화하거나 반대로 남성성을 내세운 디자인이 같은 비율로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히프 라인을 강조하기 위해 패드를 사용하고, 여성 인체의 ‘S라인’을 부각하는 브랜드가 있는가 하면 남성 슈트와 유사한 바지 정장을 선보이는 브랜드도 있었다. PFIN 이소정 수석연구원은 “매니시하고 샤프한 슈트와 여성스럽고 육감적인 아이템을 고급스럽게 믹스한 것이 최대 트렌드”라고 말했다.

3월에도 꺾이지 않은 추위에 몸을 덜덜 떨고, 벽돌 스타일 바닥에 하이힐 굽이 푹푹 빠지는 굴욕을 맛보면서도 패션피플들은 매년 두 차례씩 꼭 파리를 찾는다. 수천 명의 인력이 이동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교통수단이 탄소를 발생시킬 것이며, 얼마나 많은 현지 시민이 교통 체증에 시달릴까. 이제 각 브랜드 웹사이트를 통해서도 그 많은 쇼를 안방에서 감상할 수 있는데.

그런데도 패션쇼가 당위성을 인정받는 것은 이 행사가 단지 패션만 보는 이벤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배우 판빙빙이 뉴욕의 패셔니스타 세라 제시카 파커, 프랑스의 국민배우 카트린 드뇌브를 제치고 이브 카셀 루이뷔통 회장 옆에 앉은 이유를 ‘차이나 파워’로 해석하면 될까. 지난달 아메리칸 슈퍼볼 행사 때 마돈나가 입어 다시 이슈가 된 ‘지방시’는 왜 이번엔 팝스타 퍼프대디를 패션쇼장에 초대했을까. 패션쇼는 경제 사회 문화 등 세계 각 분야에서 벌어지는 변화들을 거시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작은 우주’다. 그래서 전 세계 패션피플은 입을 모아 한목소리를 낸다. 쇼는 계속돼야 한다고.

파리=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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