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바젤월드’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박람회로 불린다. 해마다 한 피스에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이 넘는 고급 시계와 주얼리가 한데 모이기 때문이다. 올해에는 8∼15일 8일 동안 41개국에서 온 1815개 업체가 자신들의 제품을 뽐냈다.
9일(현지 시간) ‘바젤월드 2012’를 직접 가서 보니 일반 박람회에서는 볼 수 없는 두 가지가 눈에 띄었다. 첫째는 관람객들의 가방이다. 멋들어진 정장을 차려입고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이가 적지 않았다. 공항에서 곧바로 왔기 때문은 아니다. 명품 시계업체들은 카탈로그 하나도 명품 책처럼 만들기 때문에 무겁다. 그래서 캐리어에 두꺼운 화보집 같은 카탈로그를 넣고 끌고 다니는 것이다.
둘째는 각 브랜드들이 만들어 놓은 부스의 화려함이다. 커다란 전시장에 들어서면 명품매장처럼 꾸민 2층 규모의 브랜드 부스가 죽 늘어서 있다. 특히 명품 중의 명품만 모인 1.0 홀은 프랑스 파리의 명품 거리에 온 듯한 착각을 준다. 브라이틀링은 세계 각지에서 구해 온 농어 수백 마리를 매장에 설치한 거대한 수족관에 풀어놓았다.
이런 부스에 아무나 들어가 시계를 만져볼 수는 없다. 회사 담당자와 미리 약속을 잡아야 한다. 약속시간에 찾아가 미팅룸에 들어가면 그제야 ‘금고’ 같은 곳에서 신제품을 꺼내 보여준다. ‘누구든지 와서 일단 한번 써보세요’를 외치며 최대한 개방적으로 전시장을 꾸미는 정보기술(IT) 박람회와는 딴판이다. 바젤월드는 ‘소수를 위한 특별함’이라는 럭셔리 업계의 ‘신념’을 구석구석 실천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박람회의 목적은 결국 판매다. 바젤월드가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고 있어도 결국 최종 목적은 박람회를 찾은 전 세계 바이어들에게 많이 파는 것이다. 그래서 올해 콧대 높은 고급 시계 업체들은 한껏 ‘아시아’를 외쳤다. 지난해 스위스 시계 수출액
193억 스위스프랑(약 23조9000억 원)의 약 55%가 아시아인들의 주머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 부자들이 지갑을 닫아도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신흥 부자들은 거침없이 스위스 시계를 사고 있다는 뜻이다. 프랑수아 티에보 바젤월드 스위스전시위원회 위원장은 “설사 세계 경제 전망이 어렵게 보일지라도 스위스 시계산업의 경쟁력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며 “아시아와 신흥경제국 등 좋은 시장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이에 따라 많은 고급 시계 업체가 서양인보다 체구가 작은 동양인을 위해 다이얼 크기가 작은 시계를 내놓거나 화려한 금장식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취향에 맞는 제품을 만들어냈다. 롤렉스는 베젤에 무지개 색상에 맞춘 화려한 사파이어를 박은 시계를 선보였다. 블랑팡은 시계에 로마숫자뿐 아니라 한자로도 시간을 표시하고, 해마다 그해에 맞는 띠 그림이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아시아계 배우 모델도 늘었다. 태그호이어는 2010년 중국 배우 천다오밍을 홍보대사로 영입했다. 처음에는 아시아권에 그의 이미지가 담긴 광고를 냈지만 최근에는 스위스를 포함한 전 세계에 그의 얼굴이 나간다. 중국인들이 해외여행 중에 시계를 많이 사기 때문이다. 위블로는 리롄제(이연걸·제트 리)와 손잡고 ‘에어로 뱅 제트 리’ 시계를 선보였다.
신흥 시장을 공략하는 시계업체들의 영민한 전략 덕분에 올해 바젤월드의 ‘수주’ 실적은 유럽 재정위기와 관련 없이 성공적이었다고 바젤월드 조직위원회 측은 설명했다. 유통 및 바이어는 지난해보다 1% 늘어난 10만4300명이, 기자는 9% 늘어난 3320명이 바젤을 찾았다. 프랑수아즈 베졸라 태그호이어 홍보 부사장은 바젤월드 보도자료를 통해 “올해 부스를 찾은 바이어 수가 지난해보다 30% 늘어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여성 시계 트렌드… 새의 깃털까지 활용한 예술, 비즈 우먼 환하게 밝힌다
시계는 남성들만의 ‘장난감’이다? 올해 바젤월드는 ‘노(No)’라고 단언했다. 여성들이야말로 명품 시계가 개척할 만한 새로운 시장이라는 것이다.
여성용 시계라고 해서 디자인만 예쁜 시계를 생각하면 금물이다. 남성들이 열광하는 오토매틱 무브먼트에 고도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투르비용까지 탑재한 아름다운 디자인의 시계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새의 깃털 같은 독특한 소재를 사용해 시계를 예술 작품의 경지로 끌어올린 제품도 있다.
여성 시계도 기술력이다 캐머런 디아즈는 바젤의 여왕이었다. 바젤월드를 찾은 유명인 가운데 가장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녀는 태그호이어가 올해 처음 선보이는 여성 컬렉션 ‘뉴 링크 레이디 컬렉션’의 홍보대사로서 바젤에 왔다. 이 컬렉션은 자사 연구개발(R&D)팀이 기능성과 디자인을 모두 잡겠다는 목표로 만들어 냈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조약돌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인으로 다이얼 바탕에 새겨진 S자 형태의 ‘기요셰’ 패턴이 링크라인 특유의 S자 브레이슬릿(손목을 감싸는 부분)과 함께 조화를 이룬다. 태그호이어는 “편안한 우아함을 바탕으로,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비즈니스 우먼들의 오피스룩을 환하게 밝혀줄 것”이라고 말했다. 뉴 링크 레이디 컬렉션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약 12만 유로(약 1억8000만 원)의 ‘다이아몬드 스타’. 주문제작용인 이 시계는 기술력과 디자인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보여줬다. 투명한 케이스 안에 지지대 없이 무브먼트가 떠 있다. 별이 달린 진동추는 흔들릴 때마다 우주 속에 떠 있는 별처럼 보인다. 통 로즈골드에 총 1.35캐럿 192개 다이아몬드가 눈에 띈다.
샤넬은 ‘패션 시계’라는 말을 거부한다. 스위스에서 제조하는 만큼 기술력으로 승부를 보는 정통 시계라는 것이다. 올해에는 스위스 명품 시계 중에서도 최고급으로 치는 오데마 피게 산하 R&D 조직인 ‘르노&파피’의 장인들과 함께 만든 ‘프리미에르 플라잉 투르비용’을 선보였다. 이 시계의 ‘플라잉 투르비용’ 모양은 샤넬의 아이콘 카멜리아. 1분마다 1회전 하며 꽃잎은 초를 표시한다.
파텍필립도 최근 다양한 기능이 있는 콤플리케이션 시계를 찾는 여성들이 많아졌다며 올해 첫 여성 퍼페추얼 캘린더(윤달을 계산해 날짜를 세팅한 것) 모델인 ‘7140 레이디스 퍼스트 퍼페추얼 캘린더’를 선보였다. 셀프 와인딩 방식의 자사 무브먼트 240Q를 탑재하였으며 3시와 6시 방향에 각각 월과 윤년, 요일 등 서브 다이얼을 배치했다. 퍼페추얼 캘린더와 문페이즈(달의 모양 표시) 기능 등을 지원하며, 베젤과 버클에 총 95개의 다이아몬드가 장식돼 있다.
희귀한 소재, 예술적 디자인 뱀피나 새의 깃털은 패션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는다. 트렌디하지만 구하기도 쉽지 않고, 가공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계 장인들은 시계를 예술의 영역으로 넓히기 위해 과감히 새로운 소재를 시도했다.
위블로는 트렌드세터를 위한 ‘빅뱅 보아 뱅’ 라인을 선보였다. 보아 뱅 시계는 지난해 말에 내놓은 ‘레오파드 뱅’의 선풍적인 인기에 따라 나온 것. 보아 뱅 시계는 스틸 혹은 18k레드골드 소재의 케이스, 브라운 혹은 그린 톤의 뱀피 다이얼과 스트랩으로 디자인됐다. 모두 0.14캐럿의 8개 다이아몬드가 세팅돼 있으며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가 탑재됐다. 위블로 관계자는 “청바지와 티쳐스 스타일에도, 슈트에도 스타일리시하게 어울리는 디자인”이라며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 사이에서도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해리윈스턴은 시계 제조와 깃털 세공 기술이 만난 ‘프리미에르 페더스’ 컬렉션을 선보였다. 시계 다이얼에 고대 깃털 세공사의 기술을 응용해 새롭게 세공한 깃털 장식이 수놓여 있다. 16세기 유럽에서 인기를 얻었던 깃털 모자이크 아트를 연상케 한다. 하나하나 붙여 만들기 때문에 각 시계마다 다이얼이 조금씩 다르다.
디오르는 특허받은 진동추 기술인 ‘그랑발’ 컬렉션에 깃털을 추가한 ‘그랑발 플룸’을 선보였다. 그랑발은 오토매틱 무브먼트의 진동추를 다이얼 앞면으로 위치시켜 움직일 때마다 진동추가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는 시계다, 그랑발 플룸은 진동추가 정밀하게 세공된 깃털로 돼 있다. 디오르 오트쿠튀르 드레스가 춤추는 듯한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진동추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깃털 무게를 정확하게 재고 세공해 만들었다고 한다.
바젤=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 시계 용어, 이것만은 알아두세요
이제 시계 용어도 상식이다. 관심이 없어도 알아두면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 크로노그래프
시간을 기록한다는 뜻으로 1초 이하의 시간 단위를 미세하게 쪼개 스톱워치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얼마나 미세하게 쪼개느냐가 시계의 기술력. ○ 다이얼
시계의 얼굴을 뜻한다. 시간을 읽고 각종 기능을 쓸 수 있는 판이다.
○ 베젤
다이얼 윗부분에 부착한 크리스털을 단단히 감싸는 가장자리 부분. 크로노그래프의 시계인 경우 눈금을 새긴 베젤이 많다.
○ 투르비용
1795년 아브라함루이 브레게가 최초로 개발한 투르비용은 중력의 영향을 받아 시간 오차가 발생하는 것을 최소화하는 장치다. 일부 업체만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고난도 기술이다. 이게 들어가면 고가 모델로 봐야 한다.
○ 오토매틱(셀프 와인딩) 무브먼트
진동추가 달려 있어 움직일 때마다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는 시계. 시계를 매일 착용한다면 매번 태엽을 감아줄 필요가 없다.
○ 파워리저브
태엽을 한 번 감을 때 동력을 축적하는 시간. 40시간 파워리저브이면 한 번 태엽을 감으면 40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아도 시계가 간다는 뜻이다.
○ 쿼츠
흔히 보는 배터리로 가는 전자시계. 1970년대 일본에서 등장한 쿼츠는 저렴하고 시간 오차가 없어 많은 스위스 시계회사를 줄도산하게 했다. 이를 ‘쿼츠 파동’이라 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즘은 다시 기계식이 대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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