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해부학 교과서의 신화… 그레이 일생을 해부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24일 03시 00분


◇해부학자/빌 헤이스 지음·박중서 옮김/416쪽·1만8000원·사이언스북스

헨리 그레이의 책 1901년판 표지에 있는 삽화.
헨리 그레이의 책 1901년판 표지에 있는 삽화.
1858년 처음 출간된 ‘그레이 해부학(Gray's Anatomy)’은 백과사전식 해부학 교과서다. 출간 150주년인 2008년에 40판이 나오는 등 절판 없이 지금도 계속 나오고 있다. 미국 의학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란 제목도 이 책의 이름을 철자 하나만 달리해 따온 것이다.

이 신화와도 같은 해부학 책을 쓴 사람은 영국의 젊은 해부학자 헨리 그레이(1827∼1861)다. 그러나 그가 쓴 책과 달리 그 자신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1848년 의학박사 자격을 땄고 1852년 20대의 젊은 나이에 아이작 뉴턴 등이 회원으로 있던 당대 최고 과학자 단체인 영국왕립협회 회원이었다는 것 정도다.

왜 이토록 유명한 책의 저자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을까. 의학 과학 분야의 전문 저술가인 저자는 집에서 보관하던 헨리 그레이의 책을 뒤적이다 이런 의문을 품게 되면서 해부학의 세계를 탐문했다.

그는 자신이 보관하던 1901년 영인본과 도서관에서 찾은 1858년 초판을 비교하다가 실마리를 찾았다. 초판본에는 영인본에 없는 헨리 그레이의 서문이 있었는데 여기서 그레이는 ‘완벽한’ 삽화를 그려주고 해부를 도운 헨리 밴다이크 카터(1831∼1897)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것이다. 다행히 카터는 10대 때부터 매일 일기를 썼고, 그것이 런던 웰컴도서관에 보관돼 있었다. 카터의 일기와 1년 가까이 참관한 해부학 실습 현장을 오가며 저자는 풍부한 해부학 지식을 풀어낸다.

1860년 영국의 세인트 조지 병원에서 해부학 강의를 진행하던 헨리 그레이(시신의 발 바로 뒤쪽)와 해부학 강의 수강생들. 사이언스북스 제공
1860년 영국의 세인트 조지 병원에서 해부학 강의를 진행하던 헨리 그레이(시신의 발 바로 뒤쪽)와 해부학 강의 수강생들. 사이언스북스 제공
심장에는 ‘타원오목(fossa ovalis)’이라고 불리는 부위가 있다. 오른심방과 왼심방 사이에 있는 막이다. 태아 때는 뚫려 있다가 태어나고 몇 시간 후부터 닫히기 시작해 막이 형성된다. 여기에 생명의 신비가 숨어 있다. 태반을 통해 어머니 혈액으로부터 산소를 공급받을 때는 피를 오른심방에서 허파로 보낼 필요가 없기 때문에 타원오목 자리의 구멍을 통해 바로 왼심방으로 피를 보내다가, 세상에 나와 허파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이 구멍을 닫음으로써 자기의 허파를 통해 혈액에 산소를 공급하는 것이다.

남자의 고환 중 일반적으로 왼쪽 것이 더 아래쪽으로 처져 있는 이유는 심심한 모임의 심심파적 얘깃거리로도 안성맞춤이다. 왼쪽 고환과 왼쪽 콩팥은 오른쪽과 달리 정맥으로 연결돼 있고, 심장으로 가는 그 정맥의 한 곳이 고압 동맥 사이를 지나면서 약간 눌리거나 막혀 피가 조금씩밖에 지나지 못해 왼쪽 고환에 피가 더 고이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카터의 일기로도 그레이의 일생을 재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해부학계의 현황도 책에 자주 등장한다. 저자는 그레이에 관한 정보가 적게 남은 이유에 대해 그가 조카의 천연두를 치료하다가 감염돼 사망했기 때문에 전염을 막기 위해 유품을 모두 태웠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저자는 나아가 해부의 역사로 독자를 이끈다. 124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의사의 실력 향상을 위해 5년에 한 번씩 인체를 해부해도 된다는 훈령을 발표함으로써 해부 금지의 암흑시대가 끝났다. 14세기 초 해부에 사용된 시체는 거의 처형된 범죄자였다. 당시는 방부처리 기술이 없어 추운 날 나흘 정도 만에 해부를 끝내야 했고, 먼저 부패하는 내장부터 시작해야 했다.

전문용어가 많이 등장해 사전 지식이 적은 독자는 읽기 불편할 수도 있다. 사료가 부족할 때 실제 체험을 결합해 에세이 형태로 풀어낸 저자의 방식은 논픽션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될 듯싶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책의향기#해부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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