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원인 아버지가 탄광에서 일어난 가스 폭발 사고로 숨진 뒤 탄광촌을 떠났던 준기(김종태)는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PD가 돼 17년 만에 마을을 찾는다. 탄광은 폐광이 됐고 대신 카지노가 들어섰지만 그가 알았던 사람들은 17년 전 막막해 보이던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준기가 아버지 시신을 이장하려고 하면서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이 서서히 들춰진다.
제1회 벽산희곡상 당선작인 한현주 씨의 희곡을 2010년 동아연극상 신인 연출상을 받은 류주현 씨가 극화한 연극은 과거의 비밀이 점점 드러나는 극 전개로 흥미를 불러일으키면서 관객에게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응시하게 만든다. 연극은 인생의 막다른 곳에 다다른 ‘막장 인생들’에 대한 이야기다. 동시에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이들을 우리가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담겼다. 이 작품의 장점은 사실적으로 이들의 모습을 세밀하게 보여줄 뿐 직접적으로 어떠한 해답이나 대안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준기는 조선소 타워크레인에서 회사의 정리해고에 맞서 장기 고공 시위를 벌이는 인물인 김철강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지만 회사의 판단으로 방영이 중단된 데 대해 후배가 “김철강을 살려야 한다”며 책임감을 일깨우자 “그깟 연민으로 뭘 얼마나”라고 응대한다. 또 옛 여자친구인 우영(박윤정)이 자기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비밀에 연루됐으며 이 때문에 죄의식을 가져왔음을 알게 된 준기는 “죄책감이 그 사건의 본질은 아니야. 그 감정으로 뭘 해결하겠다는 거야?”라고 윽박지른다.
제목 ‘878m의 봄’에서 878m는 준기 아버지가 묻힌 갱도의 깊이이기도 하고 탄광의 막다른 곳인 ‘막장’을 뜻하기도 한다. 더 갈 곳이 없다는 점에서 김철강의 농성 장소였던 타워크레인의 꼭대기와도 맞닿는다.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내면을 정색하고 읊는 장면들은 다소 감상적인 데다 극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끊어 아쉬웠다.
:: i :: 8일까지 서울 예장동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2만5000원. 02-758-215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