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才’는 ‘인재(人才)’이고 ‘擧’는 ‘천거(薦擧)’의 의미로 ‘유재시용(唯才是用)’과 동의어다. 능력이 빼어난 사람만을 우대한다는 조조(曹操)의 인재경영원칙이다. 웅크리며 때를 기다린 천하의 효웅(梟雄) 유비(劉備)나 부형의 뒤를 이은 수성의 제왕 손권(孫權)과 확연히 대비되는 조조의 인사지침이다. 그의 휘하에서 90여 명의 개세지재(蓋世之才·세상을 뒤덮을 만한 인재)가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다음과 같은 원칙 때문이었다.
“만일 반드시 청렴한 선비가 있어야만 기용할 수 있다면, 제나라 환공(桓公)은 어떻게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는가! 지금 천하에 남루한 옷을 걸치고 진정한 학식이 있는데도 여상(呂尙)처럼 위수의 물가에서 낚시질이나 일삼는 자가 어찌 없겠는가? 또 형수와 사통하고 뇌물을 받았다는 누명을 쓰는 바람에 위무지(魏無知)의 추천을 받지 못한 진평(陳平)과 같은 자가 어찌 없겠는가? 여러분은 나를 도와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 추천하라. 오직 재능만이 추천의 기준이다. 나는 재능 있는 사람을 기용할 것이다.”(‘三國志’ 무제기·武帝紀에 인용된 구현령·求賢令)
여기서 거론된 환공이나 진평은 빼어난 능력 때문에 중용(重用)돼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고 주군을 도와 큰일을 이뤘다. 조조가 내세운 원칙은 주위의 평판이나 도덕성보다는 재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승자와 패자, 아니 국가의 존망이 좌우되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도 모른다. 냉혹한 승부사로서 죽기 직전까지 전장을 누볐던 조조. 그가 환관 출신의 비주류로서 북방의 권문세족 원소를 이겨 자신의 시대를 열었고, 아들 조비에 의해 위(魏)나라 창업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능력과 효율 중심의 인재관을 견지했기에 가능했다.
물론 문제도 있었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대파들을 무리하게 제거하고 후계자 문제로 대립각을 세운 순욱(荀彧)을 제거한 것 등 그의 인재관에서 옥의 티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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