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풍이 심술을 부렸던 2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 거대한 흰색 텐트 4개가 등장했다. 텐트 주변에는 짙은 화장에 하늘거리는 색깔 스커트를 입고, 클러치 백을 든 ‘패션 피플’이 거센 바람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이날은 한국 패션의 자존심을 걸고 가을겨울 패션을 선보이는 ‘2012년 가을겨울(FW) 서울패션위크’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올해 서울패션위크는 예년에 비해 여러 가지로 달라졌다. 우선 서울무역전시장(SETEC)의 실내무대를 뛰쳐나와 처음으로 올림픽공원 광장에서 텐트를 치고 쇼를 진행했다. 또 패션위크에 참여할 수 있는 디자이너 선정 심사가 사라지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서울패션위크를 주최하는 서울시는 “앞으로도 고궁과 박물관 같은 다양한 장소를 적극적으로 검토해 서울과 한국패션의 매력을 해외에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가을겨울도 ‘컬러’ 파워
봄에 눈이 내리고, 가을은 여름같이 더운 이상한 기후를 의식한 것일까. 한국의 대표 디자이너들은 가을겨울 패션의 주인공인 블랙을 밀어내고 꽃무늬와 화사한 오렌지, 레드를 무대에 올렸다. 그렇다고 블랙과 회색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가을겨울 패션의 왕좌 자리에서 내려와 봄여름 대표 컬러들과 나란히 자리를 같이하게 됐다. 계절을 잊은 날씨처럼 패션도 계절에 얽매이지 않고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듯했다.
4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열린 디자이너 지춘희 씨의 ‘미스지컬렉션’도 이런 점에서 특별했다. ‘브리티시 가든’이라는 콘셉트에 맞게 영국을 상징하는 체크무늬 의상들 사이에서 옐로 그린 오렌지 레드 등 알록달록 원색이 돋보였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인기를 얻은 아역배우 김유정 양도 ‘깜짝 뮤즈’로 등장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김 양이 입은 노란색 드레스는 초등학생이 아닌 여신 같은 느낌을 줬다. 러시아와 영국 등의 다양한 문화적인 요소가 녹아든 듯한 모자와 머리 장식들도 독특했다. 지 씨는 “여성들이 모자를 즐겨 썼던 1950, 60년대 디자인을 녹였다”고 설명했다.
4일 오후 디자이너 곽현주 씨의 컬렉션이 열리는 올림픽공원의 거대한 흰색 텐트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먼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파워풀한 매력을 자랑하는 곽 씨의 컬렉션에서도 톤 다운된 컬러가 포인트 역할을 톡톡히 했다. 블랙을 기반으로 적갈색과 청록색, 그린, 오렌지 등을 조각처럼 오려 붙인 패치워크 스타일이 컬렉션의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렌지색인 여성 슈트, 화려한 프린트가 돋보이는 오렌지색과 보라색 원피스 등이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 믹스&매치 룩, 실험정신 만발… 외국 바이어 줄어 아쉬움 ▼
컬러를 따뜻하면서 재미있게 표현한 컬렉션은 부부디자이너 스티브J&요니P. ‘실용적인 퓨처리즘’이라는 주제 아래 상상력이 풍부한 패션이 주목을 받았다. 회색과 노란색, 핑크, 파란색이 한데 어우러진 니트에 옅은 핑크 빛 시폰 스커트의 매치가 오묘하게 어울렸다. 지금 당장 봄에 입어도 어울릴 만한 옅은 오렌지 톤 프린트 스커트와 레드 블라우스의 조합도 돋보였다.
서부 영화 ‘밴디다스’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이너 최지형 씨의 ‘자니해잇재즈’는 블루와 레드 컬러의 감각적인 조합이 인상적인 셔츠와 와이드 팬츠로 쇼를 시작했다. 도시에서 만나는 모던한 ‘카우걸’을 표현한 셈이다. 복고적이면서도 모던한 스타일 가운데 따뜻한 회색에 하늘색, 핑크색, 파란색 무늬가 들어간 니트 코트가 눈에 띄었다.
디자이너 송자인 씨의 커다란 꽃무늬 옷은 지금 당장 입어도 예쁠 것 같았다. 꽃무늬 드레스뿐 아니라 꽃무늬 바지, 꽃무늬 재킷까지. 특히 꽃무늬 재킷에 녹색 패딩 바지를 매치한 센스가 돋보였다.
○ 서로 다른것의 만남
털 코트도 가죽 재킷도 모직 슈트도 모두 지루해졌다면 서울패션위크에 등장한 소재의 ‘믹스&매치’를 주목할 만하다.
서울패션위크 첫날 열린 디자이너 홍승완 씨의 ‘로리앳(ROLIAT)’ 컬렉션은 재단사(tailor) 영어단어를 거꾸로 늘어놓은 브랜드처럼 클래식하면서도 위트 있는 믹스&매치를 선보였다. 주제도 ‘이종이식(XENO graft)’이었다. 슈트와 스웨터, 패딩 점퍼와 코트 등 서로 다른 종류의 옷을 매치해 새로운 하나의 느낌으로 연출한 것이다. 슈트 위에 니트 조끼를 입는 식이다. 또 자연스러운 브라운, 그레이, 카키 등 따뜻하면서도 절제된 컬러로 모던한 감성을 담았다. 이날 컬렉션에서는 남성 슈즈와 백도 눈길을 끌었다. 남성잡화 브랜드 ‘에이드레스(a dress)’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새로운 제품을 컬렉션과 함께 선보인 것이다.
디자이너 손정완 씨의 컬렉션은 첫 모델의 등장부터 어깨 소매로 눈이 갔다. 어깨에만 퍼가 들어가 과하지 않은 로맨틱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트위드 소재 원피스에 가죽 술장식과 어깨의 털 소매를 매치하는 등 서로 다른 소재들의 조합이 반전의 재미를 선사했다.
디자이너 최범석 씨는 스포츠브랜드 ‘헤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답게 스포티한 의상을 대거 내놓았다. ‘게임이 끝난 후(After Games)’라는 주제로 1960년대 겨울올림픽 스포츠 영웅들의 일상적인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 오렌지색 양가죽 소매가 달린 초록색 타탄체크 점퍼에 트레이닝복 같은 회색 팬츠를 캐주얼하게 매치한 룩이 오프닝을 장식했다. 그 후 레깅스와 조깅팬츠, 스타일리시한 패딩 점퍼 등 다양한 아웃도어 패션이 무대에 올랐다. 기능성 스포츠웨어와 스트리트 캐주얼을 접목한 점이 눈에 띄었다.
이번 서울패션위크에는 색다른 이벤트들이 디자이너들의 패션쇼와 어우러져 화제가 됐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6일 오후 열린 패션기부 행사 ‘도네이션 런웨이’에 직접 모델로 나섰다. 디자이너들이 기부한 의상을 팔아 ‘세이브 더 칠드런’에 수익금 전액을 기부하는 행사다. 기부행사를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박 시장이 직접 런웨이에 오르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 줄어든 바이어… 아쉬움 남아
모두 67회 패션쇼가 열려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진 이번 서울패션위크. 그런데 정작 중요한 사람들이 보이질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바로 해외 바이어들이다. 주최 측이 초청장을 보낸 미국 고급 백화점 바니스 뉴욕의 제이 벨 부사장과 영국 백화점 하비 니콜스의 샘 커쇼 부사장 모두 불참했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서울시와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가 함께 장소를 선정하고, 일정을 정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지체돼 쇼를 시작하기 2주 전에야 모든 일정이 정리가 됐고, 그 바람에 바이어 초청이 늦어졌다”며 “지난해보다 바이어 수가 30%가량 줄었다”고 말했다.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한정된 예산으로 장소 사용료를 내고, 야외 텐트를 치고, 전기를 끌어오는 것 등에 약 10억 원이 들어 바이어나 해외 외신 초청이 소홀해졌다는 의견도 나왔다.
패션위크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디자이너 선정 문제도 여전히 숙제로 남았다. 그동안 서울시가 주도해 디자이너를 심사하는 제도가 논란이 돼 이번에는 폐지됐지만 여전히 쇼의 수준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것이다. 서울패션위크 관계자는 “일부 바이어들이 쇼는 너무 많아졌고,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며 “서울시와 디자이너들은 서울패션위크를 뉴욕이나 파리처럼 비즈니스의 장으로 키울 것인지, 단순히 시 예산으로 운영하는 축제로 만들 것인지 갈 길을 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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