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한국 친구들, 채만식에 대해 왜 나보다 모르나요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4월 14일 03시 00분


한국 문학에 푹 빠진 세 외국인들

요한나 쿤오시우스 씨의 책 읽기는 비단 소설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비야 씨의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도 읽었어요. 저도 여행하는 거 좋아하거든요.” 그녀는 꼭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으로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 을 꼽았다. 양희성 기자 yohan@donga.com
요한나 쿤오시우스 씨의 책 읽기는 비단 소설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비야 씨의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도 읽었어요. 저도 여행하는 거 좋아하거든요.” 그녀는 꼭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으로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 을 꼽았다. 양희성 기자 yohan@donga.com
《 “한국 친구들한테 채만식 좋아한다고 하면 ‘너 미쳤어?’란 반응이 돌아와요.” 요한나 쿤오시우스 씨(35·여)가 웃으며 말했다. 패트릭 버고 씨(35), 앤드루 크렙스바크 씨(27)도 비슷한 말들을 쏟아냈다. 이 3명은 모두 미국인. 쿤오시우스 씨는 한국 대기업에 다닌다. 한국 여성과 가정을 꾸린 버고 씨도 한국능률협회에서 일하고 있고, 크렙스바크 씨는 서강대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 중이다. “한국인 친구들 중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버고 씨) “한국 소설에 대해 물어보면 다들 ‘고등학교 때 읽었는데 잘 기억이 안 나’라고 대답하죠.”(크렙스바크 씨) 남 이야기 같지 않아 괜스레 가슴이 뜨끔해졌다. 자신이 읽은 한국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Royal Asiatic Society-Korea Branch)’에서 운영하는 독서클럽에 모여 들었다. ‘O₂’가 한국 소설 읽기에 빠진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 음식으로도 표현되는 시간들

“황순원의 ‘소나기’는 별로 안 좋아해요. 너무 뻔하고, 유치한 것 같아요.”

쿤오시우스 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한국 소설을 읽는 이유는 간단하다. 문학을 통해 한국인들의 사고방식과 몸에 새겨진 경험들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상식’이라고 여기는 것들도 그에겐 생소한 경우가 많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쓰인 책들을 보면 가끔 사이렌 소리가 나와요. 그 소리가 울리면 사람들이 다 집으로 들어가죠. 제겐 그런 경험이 전혀 없어요. 책을 통해 그 당시의 한국 생활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거죠.”

얼마 전에는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읽었다.

“주인공의 아내가 죽어서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돈이 없어요. 그래서 시신을 팔고 4000원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잖아요. 지금 4000원은 커피 값 정도인데…. 그리고 참새꼬치를 먹는 모습도 나오고요. 그런 부분들을 알아가는 게 재미있어요.”

지금도 참새꼬치를 파는 데가 있다고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별로 먹어 보고 싶지는 않아요.”

세 사람이 감명깊게 읽었다는 한국 소설들과 실제로 그들이 독서클럽에서 사용하는 있는 영문 번역본.
세 사람이 감명깊게 읽었다는 한국 소설들과 실제로 그들이 독서클럽에서 사용하는 있는 영문 번역본.
버고 씨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가 느끼기에 한국 사회는 외국인이 그 일원이 되는 게 가장 힘든 나라들 중 하나다. 왜냐면 한국에는 한국인들만 알거나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군대, 대학수학능력시험, 설과 추석 등등. 한국인들은 다들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자라난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미국에선 그렇지 않았다. 땅이 넓고 사회가 다원화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세대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경험을 하면서 자랐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공유하는 경험들은 종종 외국인에게 큰 벽으로 작용한다.

“한국인들만의 그런 경험들이 문학에 들어 있죠. 한국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고 말하는지, 그런 태도들이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를 문학을 통해 알 수 있어요.”

또 재미있는 것은 한국 소설에는 유난히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장치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 가령 ‘삼계탕을 먹는다’라는 구절이 나오면, 한국 사람들은 삼계탕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그날이 복날, 즉 여름철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삼계탕을 언제 먹는지 모르는 외국인들에게는 그저 음식에 대한 이야기로만 읽힐 뿐이다. 벚꽃도 마찬가지이다. 벚꽃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한국 독자들은 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안에 담겨진 새로운 시작이란 의미까지 읽어낸다.

“지금까지 제가 책을 읽어본 바에 따르면, 미국 작가들은 그런 장치들을 많이 쓰지 않는 것 같아요. 미국에서는 한국에서처럼 음식이 그렇게 계절을 타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란 그에게 모든 음식은 슈퍼마켓에 가면 바로 다 살 수 있는 것들이었다. 딸기가 어느 계절에 재배되는지 알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식물 이름들도 굉장히 많이 나오고 다양하죠. 제가 지금 한국말로 알고 있는 식물 이름들 중에서도 그것이 영어로 무엇인지 모르는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웃음)”

○ 그래도 보는 눈은 다 똑같다

이태준의 ‘까마귀’에는 작가인 ‘그’가 등장한다. 친구의 별장을 찾은 ‘그’는 정원을 산책하던 중, 요양을 위해 그곳을 찾은 여인을 만난다. 폐병을 앓고 있는 그녀는 별장 주위의 나무에 날아와 둥지를 틀고 있는 까마귀 소리를 병적으로 싫어한다. 까마귀가 마치 그녀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까마귀에 대한 그녀의 공포를 덜어주기 위해 까마귀를 잡아 매달아 놓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그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의 상여가 나간다.
▼ 음식·꽃·사투리 표현 감칠맛… 性的 소재 교과서 실려 놀라워 ▼

8일 오후 서울 중구 예장동에 있는 ‘문학의 집, 서울’에서 앤드루 크렙스바크 씨(왼쪽)와 패트릭 버고 씨가 책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크렙스바크 씨가 들고 있는 책은 채만식의 ‘태평천하’ 영문 번역본. 두 사람은 한국 문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한국어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8일 오후 서울 중구 예장동에 있는 ‘문학의 집, 서울’에서 앤드루 크렙스바크 씨(왼쪽)와 패트릭 버고 씨가 책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크렙스바크 씨가 들고 있는 책은 채만식의 ‘태평천하’ 영문 번역본. 두 사람은 한국 문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한국어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폐병 환자인 여인의 죽음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죽음의 문제를 그린 작품. 버고 씨는 이 작품이 좋다고 했다.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생각하는 거잖아요. 보통 나이 든 사람들이 더 많이 생각하기는 하지만(웃음). 어떻게 살 것인가, 왜 살아야 되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어요. 한국 소설에 등장하는 풍부한 주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한국인이 될 필요는 없는 듯해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철학도다웠다. 이상의 ‘날개’도 좋단다. ‘날개’는 어떤 시대나 장소가 배경이 될지라도, 이야기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 물론 1936년에 발표된 만큼 일제강점기의 현실을 담아냈겠지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그의 가슴을 여전히 강렬하게 두드린다고 한다.

“가끔 오래전에 쓰인 책들을 읽다 보면 ‘귀엽네’란 생각이 들 정도로 내용이 유치할 때가 있거든요. 당시에는 좋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가 지닌 힘이 시간과 함께 사라져 버린 거죠. 가장 좋은 문학은 시간이나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크렙스바크 씨가 “나도 ‘날개’를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매우 복잡하고 어렵지만, 그만큼 ‘해석’의 여지가 많다는 것.

아이러니였다. 실제로 이상은 그 시대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비운의 작가였다. 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들어서다. 그제야 ‘날개’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이 교과서에 실리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요소를 잉태한 모더니즘의 선구자’라는 학자들의 평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크렙스바크 씨는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로 최인훈의 ‘광장’을 꼽았다. 주인공 이명준의 삶을 읽는 중에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등에 대한 존재론적인 고민들이 이어졌다. 한창 대학에서 진로와 미래에 대해 걱정하던 때였다. 그런 그에게 ‘광장’과 ‘밀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명준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광장’에서 이명준은 남한 사회에서도, 북한 사회에서도 희망을 찾지 못하고 결국 제3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바다로 몸을 던진다. 이 소설에서 ‘광장’은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삶을 상징하고, ‘밀실’은 그 대척점에 있는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삶을 뜻한다.

○ 이디엇 엉클 vs 이노센트 엉클

지난달 26일 열렸던 독서클럽에서는 채만식의 ‘치숙(痴叔)’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여기선 미리 정해놓은 소설 하나를 읽어와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그 자리에서 흥미를 끌었던 것은 ‘치숙’이란 책 이름의 번역 문제. 한자로 ‘어리석을 치(痴)’자를 썼는데, 영어로는 ‘이노센트 엉클(innocent uncle)’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한 논의들이 이어졌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이디엇 엉클(idiot uncle)’이라고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그 자리가 끝난 후 수업에서 크렙스바크 씨에게 ‘치숙’ 전체를 번역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아직 제목을 어떻게 번역할지 정하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이노센트’가 더 좋지 않을까 싶네요. 왜냐면 ‘이노센트’ 안에 순진하다는 뜻과 바보 같다는 뜻이 함께 들어가 있거든요. 작가가 그 삼촌을 비난할 수도 있고,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 가지 의미를 다 전달하고 싶어 했던 거 아닐까요?”

그러나 쿤오시우스 씨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한자의 본뜻을 살려 ‘이디엇 엉클’이 되어야 한다는 것.

“번역은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두 언어에 대해 깊이 알지 않고서는 작가가 의도한 바를 그대로 전달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버고 씨가 말했다. 그에겐 특히 사투리가 고민거리다.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이 사용하는 사투리는 그의 성격과 성장 배경 등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그런 것들을 살려 번역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영어로 읽을 때는 그런 부분들은 거의 잡아내지 못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게 안타깝죠.”

문득 버고 씨가 진지한 주제를 들고 나왔다. 한국 서점에 갔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이 체 게바라 평전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던 것이라고 했다. 공산주의 사상가들의 책들도 인기가 많다는 것에 또 놀랐다. 버고 씨는 한국인들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또래의 미국인 중 누구도 공산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공산주의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

“한국 소설을 읽으면 한국 사회에서 공산주의가 가지고 있는 의미들도 보이죠. 지식인들이 왜 공산주의에 빠져들었는지 등을 중심으로 읽으면 재미있어요.”

그러고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성적인 요소들이 많이 담긴 소설들이 교과서에 실리는 것도 놀라워요. 미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는 그런 소설들은 읽어본 적이 없거든요.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한국 사회에서….”
☞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1900년대 설립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교류 모임이다. 교육분야 총책임이자 외교자문관으로 고종황제를 보좌했던 호머 헐버트 박사를 비롯한 17명의 선교사와 외교관이 만들었다. 현재 활동하는 회원은 약 1000명으로, 한국과 관련된 연구 활동과 함께‘강의’‘문화답사 프로그램’등을 통해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창립 당시 영국의 왕립아시아학회로부터 ‘한국지부’로 인정을 받았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한국문학#외국인#왕립아시아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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