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넌 생긴 건 중국 사람인데 왜 미국 영어를 쓰니?” 그 아이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사납게 쏘아붙였다.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 미안한 기색조차 없었다. 조금 지나자 옆에 있던 친구들까지 거들었다.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 마치 거대한 벽에 둘러싸인 기분. 배고픈 이리 떼에 쫓기는 한 마리 양처럼 몸이 움츠러들었다.하지만 대꾸는커녕 눈조차 마주보지 못했다. 그냥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 마음속으로 빌었다. 1985년의 어느 날. 승연이 영국 런던의 한 사립학교에 전학 온 첫날이었다. 》 ○ “나는 거울이야”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난 승연은 네 살 때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외국 생활을 시작했다. 캐나다를 시작으로 말레이시아 덴마크 등에 머물다 열세 살 때 런던에 왔다.
남들은 다 부러워할 법한 외국 생활. 하지만 승연은 남몰래 마음속에 하나의 철칙을 키웠다. ‘나는 절대 친구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겠다.’
3년도 못 채우고 다른 나라로 이사 가기를 반복하다 보니 누군가와 헤어지는 게 두려웠다. 한번은 친구들과 얘기 도중 자기도 모르게 이런 소리까지 했다. “나는 거울이야. 너희가 해준 만큼만 나도 해줄 생각이거든.” 머무는 동안 심심하지 않을 만큼만 누군가와 친해진다. 상실의 아픔을 막는 방어 기제를 어린 승연은 그렇게 본능적으로 터득했다.
그런 그녀에게 런던 생활은 또 다른 시련이었다. 동양인이라곤 중국계 영국인 2명밖에 없는 어색한 분위기. 비슷한 처지의 학생들이 모인 국제학교가 아닌, 일반 사립 여학교에서 그녀는 그저 ‘이방인’일 뿐이었다. 학생들은 수업 시작 전 모두 일어나 선생님에게 “굿모닝, 티처”라고 인사했다. 이런 딱딱한 격식 하나까지 낯설고 어려웠다.
특히 그녀의 미국식 발음을 두고 친구들이 놀릴 땐 참기 힘들었다. 가뜩이나 내성적인 성격에 당시 사춘기까지 겪던 승연은 갈수록 움츠러들었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 틀어박혀 TV만 봤다.
그렇게 반년쯤 지냈을까. 우연히 ‘파티 라인’을 알게 됐다. 친구가 없어 외롭던 그녀는 비슷한 또래 아이들 몇 명이 전화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놀잇거리인 파티 라인에 푹 빠졌다. 이름조차 밝힐 필요가 없었기에 거기선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 이런 말을 건넸다. “넌 목소리가 참 좋구나.”
런던에 온 뒤 처음 들은 칭찬. 이 한마디를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환하게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내가 틀린 게 아니다. 단지 남들과 좀 다를 뿐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니 멀게만 느껴지던 영국식 영어가 친숙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또 라디오 DJ처럼 누군가에게 목소리를 들려주는 일을 하고 싶단 꿈을 어렴풋하게 품게 됐다.
○ “우리 집에 놀러 올래?”
어렵게 자신감을 가지게 됐지만 학교 친구들과의 거리는 여전했다. 그들에게 먼저 다가갈 용기까진 아직 없었다.
그때 한 친구가 먼저 다가왔다. 메리였다. 키가 180cm나 되는 흑인 여학생 메리는 항상 웃는 낯에 자상하고 유머감각까지 뛰어나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 하루는 여느 때처럼 수업이 끝난 뒤 혼자 집에 가려는데 뒤에서 메리가 불렀다. “혹시 별 일 없으면 우리 집에 놀러 올래?”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던 그 얼굴. 승연의 눈에는 천사처럼 보였다.
당시 메리의 집은 학교 친구들로 북적거리는 ‘아지트’로 유명했다. 메리의 후광 덕분일까, 승연의 밝아진 표정 때문일까. 다른 친구들도 조금씩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왔다. 런던에 온 뒤 처음으로 승연은 이날 해방감을 맛봤다. 메리의 어머니와 수다를 떠는 것도 즐거웠고, 친구들과 속 깊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날을 계기로 학교생활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다. 이듬해엔 반장으로 뽑혔다. 처음으로 남자친구도 사귀었다.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눈부시게 잘생긴 남자친구. 하지만 사귄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승연이 갑자기 캐나다로 떠나면서 첫사랑은 짙은 아쉬움만 남긴 채 짧은 추억에 머물렀다.
캐나다로 떠나기 하루 전, 승연은 메리와 단둘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말이 많던 메리였지만 이날만큼은 별 말이 없었다. 누구보다 헤어지는 법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승연 역시 작별인사가 혀끝에서만 맴돌았다. 그만큼 이별은 여전히 아팠다. 하지만 메리의 따뜻한 마음과 영국에서의 경험은 이후 이어질 낯선 한국 생활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됐다.
1989년 10월. 승연은 캐나다 생활을 끝으로 한국에 왔다. 여자는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한국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아버지 뜻에 따른 결정이었다.
처음 한국 생활은 아침에 눈을 뜨기 싫을 만큼 하루하루 ‘지옥’이었다. 그 시절 여고의 친구들은 외국인들이 그녀를 대할 때보다 더 이방인처럼 그녀를 바라봤다. 어눌한 한국어에 긴 머리는 언제나 놀림감이 됐고, 어쩌다 외국 얘기라도 할 때면 잘난 체한다며 또 욕을 먹었다.
○ “인생은 네가 하기 나름이다”
힘든 고교 생활을 마치고 대학(이화여대 불문과)에 진학했지만 학교생활은 지루했다. 근엄한 표정으로 설교하듯 강의하는 교수님들에 대한 실망감도 컸다.
그러다 2학년 때 들어간 한 전공수업. 5분도 안돼 몸에 전율이 왔다. 김치수 교수님이었다. 교수님은 ‘개구리 왕눈이 아빠’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구수한 외모를 뽐냈지만,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모습만큼은 어떤 영화배우보다 근사했다. 승연은 그 열정에 매료돼 침 세례를 받아가면서도 항상 맨 앞에 앉았다. 실존주의 문학 등을 가르치는 그 수업에 눈을 반짝거리며 빠져들었다.
한번은 교수님이 특유의 호소력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생은 네가 하기 나름이다.” 짧지만 진심이 담긴 그 말이 그대로 화살처럼 가슴에 와서 박혔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뜻대로 살아온 승연은 처음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뭘까.’
또 하나. 승연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강연은 입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바로 그때 김 교수님에게서 배웠다.
지난해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 해안 도시인 더반. 2018년 겨울 올림픽 개최지 투표 직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에게 한 표를 호소하는 최종 프레젠테이션(PT) 시간. 한국 평창을 홍보하는 PT의 마지막 순서를 장식한 주인공은 이명박 대통령도, 피겨 여왕 김연아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 수줍음이 많아 친구들과 눈도 못 마주치던 그 소녀, 나승연(39·당시 유치위원회 대변인·현재 영어 PT 컨설팅회사인 ‘오라티오’ 대표)이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그 순간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단상에 올라섰다. PT를 시작할 때까지의 그 짧은 순간 참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성적인 그녀에게 웃음을 선물한 친구 메리, 말에 열정을 불어넣는 법을 가르쳐준 김치수 교수님,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아리랑TV에서 4년 동안 열정적으로 일하며 얻은 기억들…. 그런 기억을 바탕으로 PT를 시작했다. 자신감은 넘치되 편안한 표정, 부드러우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시선, 감정과 이성을 절묘하게 섞어낸 목소리. 리허설 때마다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터뜨렸지만 이번만큼은 꾹 참았다.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울리기 위해 진심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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