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기다리며’… 27년 역사 산울림소극장 세대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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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19일 03시 00분


임영웅 씨 아들 임수현 교수 예술감독 맡아 ‘가업’ 승계
‘연기 속의 그녀’로 연출 데뷔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거구의 아버지와 아담한 체구의 아들이 나란히 섰다. 아버지는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연출가 임영웅 씨(78·사진 오른쪽), 아들은 임수현 서울여대 불문과 교수(47)다. 호랑이 연출가로 유명한 아버지는 아들이 주눅들까 봐 다정한 미소를 짓는데 소년처럼 얌전해 보이는 아들은 다소곳한 자세를 풀지 않는다.

그 묘한 긴장감에 많은 것이 담겼다. 프랑스에서 10년 유학생활을 하고 대학교수로 자리 잡은 아들이 아버지가 27년간 이끌어온 산울림소극장을 이어받기로 했다. 연극계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재산을 물려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100석 미만의 소극장을 운영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보다 아버지 자신이 제일 잘 안다.

“연극은 자기가 좋아서 해야 하고, 가족이 인정하고 지지해줘야 할 수 있어요. 잘 해야 겨우 본전인 소극장 운영은 더욱 그렇고. 지난해 가을 이 녀석이 첫 안식년에 들어갔기에 ‘너만 좋다면’ 하고 운을 뗐더니 ‘늘 부모님 고생하시는데 도움이 못 돼 죄스러웠는데. 한번 맡아 보겠다’ 하더군요.”

산울림소극장은 1985년 임영웅 씨와 부인인 오증자 전 서울여대 교수가 사재를 털어 마련했다. 오 교수가 번역하고 임 씨가 연출한 ‘고도를 기다리며’의 둥지이며, 박정자의 ‘위기의 여자’, 윤석화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 손숙의 ‘담배 피우는 여자’의 탄생지이다.

초등학생 때 이 극장에서 공연한 ‘고도를…’을 보고 연극에 눈을 뜬 임 교수는 불문학자인 어머니의 길을 쫓다가 어머니가 퇴직한 같은 학교 같은 학과의 교수가 됐다. 이어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버지의 길을 쫓아 연출가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제 석사와 박사 논문을 ‘고도를…’을 쓴 사무엘 베케트로 썼습니다. 꼭 베케트를 쓰겠다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됐고, 꼭 연극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닌데 이 자리에 선 걸 보면 운명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 결정을 계기로 산울림소극장은 임 교수의 누나인 임수진 씨(49)가 어머니가 맡던 극장장으로 하드웨어를 책임지고 임 교수는 아버지가 맡았던 예술감독으로 소프트웨어를 책임지는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임영웅 씨는 매년 올리는 ‘고도를…’의 연출 정도만 맡는다.

첫 단계로 임 교수는 지난주 산울림에서 개막한 ‘연기 속의 그녀’(에마뉘엘 로베르 에스팔리외 작)로 연출 데뷔했다. 담배를 둘러싸고 갈등하는 한 쌍의 연인을 통해 주체와 타자의 진정한 소통을 경쾌하게 풀어낸 프랑스 번역극.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대학살의 신’ ‘게이 결혼식’ 등 프랑스 희곡을 번역해온 임 교수가 산울림의 세대교체를 알리기 위해 고른, 세련된 소품이다. 서은경과 최규하 두 젊은 배우가 호흡을 맞췄다.

임영웅 씨는 “연극은 누가 가르쳐준다고 터득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연출에 일체 간여하지 않는데, 첫날 공연 때 보니 제법 재주가 있는 것 같아 안심”이라며 활짝 웃었다. 임 교수는 “갈 길이 한참”이라면서도 “언젠가는 아버지의 대표작 ‘고도를…’에도 꼭 한번 도전해 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연기 속의 그녀’는 29일까지. 1만5000∼3만 원. 02-334-5915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연극#산울림소극장#임영웅#임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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