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3년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에는 초상화를 그려주는 ‘채석강도화소’가 설립됐다. 이곳에선 사진을 보내면 초상화를 그려주는데 사진이 없으면 사진사의 출장 촬영도 가능하다는 친절한 서비스 안내와 함께 쌀 한 말이 1.8원 하던 시절에 ‘전신 초상 100원’이란 작품 가격까지 명시한 전단을 뿌리고 적극 홍보를 펼쳤다. 당시 초상화는 감상용 작품이 아니라 제사를 위한 의식용 그림이라서 수요가 꽤 있었다. 이 같은 공방시스템을 도입한 사람이 바로 근대의 초상화가로 명성을 떨친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1850∼1941)이었다. 》
전북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자락에 자리한 전북도립미술관은 고종의 초상을 그렸던 어진화가이면서 최익현 황현의 초상화로 알려진 채용신을 화두로 삼아 현대에 이르기까지 초상을 주제로 한 작업의 진면목을 살펴보는 ‘채용신과 한국의 초상미술-이상과 허상에 꽃피다’전을 마련했다. 이흥재 관장은 “서울 출생이지만 집안 연고지인 전북에 정착해 생을 마감할 때까지 40여 년간 활동한 채용신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인물”이라며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그의 예술세계를 자리매김하는 전시”라고 말했다.
무인 가문에서 태어난 채용신은 인생 전반부를 무관으로 살았고 후반기엔 화가의 길을 걸었다. 중인 출신이 주로 활동했던 초상화 세계에서 양반으로서 당당히 전업화가를 선언한 점에서 ‘근대성’을 실천한 인물로 평가된다. 지난해 국립전주박물관이 그를 조명한 데 이어 이번 전시에선 채용신과 함께 권진규 류인 김호석 이용덕 이종구 최석운 홍경택 씨 등의 회화 조각 설치 등 31명의 작업을 선보였다. 5월 28일까지. 063-290-6888
○ 근대의 얼굴들
근대 초상화의 지평에 우뚝 섰던 채용신이 그린 얼굴엔 ‘털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극사실적 표현과 정신적 내면을 담아내는 ‘전신사조(傳神寫照)’를 강조한 전통의 맥락이 오롯이 스며 있다. 전시를 기획한 미술평론가 조은정 씨는 “뒷면에서 물감을 칠하는 배채법, 사진처럼 세밀한 묘사, 정면을 향한 얼굴 등 전통양식을 따르면서도 원근과 음영법 등 서양화법을 접목하고 사진매체를 활용하는 등 근대 초상화의 전통과 새로움을 동시에 연 작가”라고 소개했다.
새로 공개된 허담 초상에서도 외형과 성품의 묘사, 전통과 서구 기법이 조화를 이룬다. 미간 깊이 파인 주름살과 예리한 눈빛에서 주인공의 단단한 성품이 드러나고, 옷감의 성근 올과 옷 주름의 표현에서 원숙한 기량을 보여준다. 그를 이어 아들(상묵), 손자(규명)도 화가로 활동했는데 3대가 그린 초상화가 처음 선보인 것도 화제다.
그가 그렸던 고종 어진과 함께 김은호 화백이 그린 순종 황제 밑그림, 정종미 씨의 명성황후 등 왕가의 가족이 초상으로 재회하는 공간도 인상 깊다. 강애란 김홍식 서유라 등 현대작가들의 채용신을 주제로 한 설치작품과 회화도 눈길을 끈다.
○ 현대의 얼굴들
‘초혼, 추억하고 기억하다’ ‘동행, 우리 시대 우리 삶’ 등 현대의 초상을 조명한 전시장에선 작가들의 인물관과 우리 시대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시인 고은 김남조(손연칠) 화가 권옥연 탤런트 고두심(이원희)의 초상은 동·서양화의 정통기법을 보여준다. 빛바랜 흑백사진을 재현해 기억과 망각의 경계를 탐구한 조덕현, 팝아트계열 초상을 선보인 이동재, 자연과 하나 된 티베트 어린이의 해맑은 미소를 그린 임영선 씨 등도 눈길을 끈다. 한영욱 이광호 강강훈 씨는 사실적이면서 각기독특한 개성의 인물화를 선보여 관객들이 그림 속 인물과 시선 및 감정을 교류하도록 이끈다.
채용신이 전통과 근대의 가교를 놓았듯이 이 전시는 시간의 벽을 넘어선 인물 초상을 통해 근·현대미술의 접점을 찾고자 시도한다. 초상화로 기술된 시대풍경을 돌아보면서 순간순간 사그라지는 우리의 삶을 성찰해보는 것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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