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 쇼퍼홀릭인 내가 죄책감 없이 쇼핑하러 가는 건 취재할 때다.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쇼핑 아니고 수사하러 간다”고 말한다. 그렇게 동대문시장과 명동, 청담동을 돈다.
한낮의 동대문시장에선 예전처럼 가짜 가방을 내걸거나 옷마다 ‘샤넬’ ‘돌체앤가바나’라는 이름표를 붙여놓고 팔진 않는다. 그 대신 눈길이 멈추면 “언니, 여기 샤넬∼” “그거 아르마니 꼴레지오네 2012 에스에스(봄여름)컬렉션”이란 설명이 오디오 서비스처럼 쏟아진다. 샤넬이고 아르마니인데 안 사? 소리 없이 분명하게 들리는 말들. 고백하건대, 도매시장에 가면 무서운 내공의 여사장님들 때문에 나는 주눅이 든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슬금슬금 아래로 깔리던 내 눈이 꽃무늬 미니 칠판 위에 쓰인 사장님의 진짜 말씀을 발견한다.
‘럭셔리의 반대말은 빈곤이 아니라, 천박함이다. -마드무아젤 샤넬’
맙소사. 왜 저 말은 늘 가장 럭셔리하지 않은, 럭셔리와 ‘반대’되는 어디쯤의 상황에서 마주치는 걸까. 동대문 도매시장에서 명품의 10분의 1 가격에 짝퉁을 살까말까 고민하는 순간에.
장 콕토, 피에르 르베르디 같은 당대의 문인들과 절친이었으며 신랄한 말솜씨로 유명했던 샤넬은 젊은 시절 보그(Vogue) 등에 ‘잠언’을 게재하곤 했다. 샤넬이 ‘럭셔리 브랜드의 지존’으로 올라서자 그녀의 말도 빛을 발했다.
하지만 내가 진주알처럼 우아한 샤넬의 잠언을 만나게 되는 건 블랙과 화이트의 샤넬 부티크에서가 아니었다. 샤넬의 C자 로고를 O자로 위장한 가방들이 쌓인 새벽시장, 전당포도 겸하고 있으니 애용을 바라노라는 중고명품점의 홈페이지, 모조품에 ‘라이트버전’이라는 씻나락 까먹는 이름을 붙여놓은 인터넷쇼핑몰, 그리고 사기꾼의 입에서였다. 재미교포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여성은 샤넬 로고로 가득한 집에 사람들을 초대해 럭셔리의 반대말이 뭔지 아느냐고 묻곤 했다. 명품을 남용해 투자자를 유혹했던 그녀는 사기 혐의로 구속됐다.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지만 샤넬에 대한 그녀의 열정만은 진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내가 그녀에게 대답을 했던가? 여사장님이 말한다.
“가격이 싸도 럭셔리할 수 있다는 얘기죠. 우리도 수입원단 쓰고 재단 똑같이 해요. 우리 옷 입고 에르메스 A급 사서 들어봐요, 럭셔리하지. 명품, 그거 다 광고비야.”
샤넬은 “복제는 사랑”이라고 말할 만큼 모방에 관대했다. 직접 가짜(인조) 보석들을 만들기도 했다. 귀부인들이 ‘목에 수표를 걸고’ 거들먹거리는 게 싫어서였다. 지독하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술집 가수, 재단사 보조를 전전한 샤넬에게 럭셔리의 반대말, 즉 천박함이란 진실을 질식시키는 럭셔리의 과시였다.
하지만 샤넬도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자 자서전에서 미천한 출신과 음습한 과거를 가짜 보석들로 바꿔치기하고 싶어 했다. 목걸이든 인생이든, 진짜든 가짜든 아름다워야 한다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샤넬과 동대문의 여사장님이 그러하듯 누구나 자신만의 럭셔리와 빈곤과 천박함을 갖고 산다. 럭셔리이길 바라며 천박함의 손을 잡고, 고독에 대한 공포 때문에 럭셔리를 과시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그 3자 대면의 자리를 피해온 나는 아무 패도 없이 포커판에 낀 사람처럼 황망히 등을 보이고 말았다. 미로 같은 상가를 영악한 모르모트처럼 빠져나오자 펜디의 모피 같은 부드러운 공기가 몸을 감쌌다. 봄날의 비는 폴 스미스의 컬러스트라이프처럼 바닥을 향해 짧고 긴 선을 그린다. 보도의 벚꽃 잎들은 디오르의 그 유명한 꽃무늬. 동대문시장 앞에서, 이 정도면 됐다, 고 나는 중얼거린다. 消波忽溺 쇼퍼홀릭에게 애정을 느끼며 패션과 취향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