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쪽 눈이 시력차가 커 초점이 잘 안 맞아요. 갑자기 시야가 흐려질 때가 있는데, 그러면 한쪽 눈을 감고 그렸어요. 젊을 땐 밤새워 작업했는데, 이젠 점점 게을러지더라고. 그렇게 2년이 걸렸지요.”
국내 1세대 삽화가 홍성찬 화백(83)이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린 책 ‘토끼의 재판’(보림출판사)을 최근 펴냈다. 당뇨에 노안이 겹쳐 그리기 힘든 상황에서도 매일 8시간씩 2년 동안 매달려 완성한 그림책이다. 9일 경기 고양시의 자택에서 만난 홍 화백은 “숙달됐으니까, 그저 지난 60년간 해왔듯 하나하나 선을 그었을 뿐”이라고 했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에 재능이 있었던 홍 화백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6·25전쟁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했다. 전후 1955년 먹고살기 위해 ‘희망사’라는 출판사에서 잡지나 책에 들어가는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삽화료는 당시 쌀 두 되 값인 장당 40원이었다. “전문 삽화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하다 보니 잡지사 신문사 출판사 등에서 일감이 계속 들어왔어요. 미술을 전공하지 않아서인지 삽화료도 좀 쌌거든.”
홍 화백이 본격적으로 어린이 그림책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86년 ‘개미와 베짱이’를 펴내면서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사실성. 무엇 하나 그리더라도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았거든. 짚신 삼는 것, 돗자리나 가마니 짜는 것, 지붕이나 초가를 올리면서 집 짓는 것을 보면서 무척 좋아했어요. 고맙게도 기억력이 좋아 대부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은 거야. 그림을 그릴 때 실물도 보고 어릴 적 기억도 떠올렸지.” ‘집짓기’(보림출판사·1996년) 그림을 그릴 땐 전통집 짓는 걸 보았던 기억이 큰 도움이 됐다.
그가 글과 그림을 모두 담당한 건 ‘아빠는 어디에’(재미마주·2009년)에 이어 ‘토끼의 재판’이 두 번째다. 나그네가 허방다리(함정을 뜻하는 우리말)에 빠진 호랑이를 구해줬다가 잡아먹힐 위기에 처하지만 토끼의 지혜로 목숨을 건진다는 내용이다. 어릴 적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새롭게 풀어냈다.
후배 그림책 작가 류재수 씨는 책 마지막 장에 이런 추천사를 남겼다. “흐릿한 시력에 의지해 그린 탓에 지난날의 엄격하고 치밀한 묘사는 무뎌졌고 일부분은 형태가 흐트러졌다. 하지만 홍 선생 특유의 투박하고 온기 있는 서정은 예나 다름없었으며 화면에 스민 빛의 밝은 기운은 예전보다 풍부했다…‘나 홍성찬은 아직 건재하다오’ 하고 여유를 부리는 듯하다.”
경기 파주출판도시 보림홍성찬갤러리에서는 이달 31일까지 홍 화백의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전시 ‘지금, 골목에 서서’가 열린다. 이 갤러리는 그림책 인생 60년을 살아온 ‘쟁이’ 홍 화백을 기리기 위해 2005년 만든 공간이다. 그와 함께 활동해온 원로 삽화가들의 모임 ‘무지개일러스트회’ 소속 작가들의 그림도 함께 전시한다. 이 전시는 그림책 작가 류재수 권윤덕 이혜란 씨와 그림책 연구가 조현애 씨, 보림출판사 박은덕 편집팀장 등으로 구성된 ‘우리 그림책 탐험대’가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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