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초년병 시절 큼지막한 스크랩북과 두툼한 노트는 필수였다. 스포츠 전문지에 난 전날 프로야구 경기 기록표(1루수 땅볼, 2루수 땅볼 등 땅이 많이 들어간다고 해서 일명 땅표)를 가위로 오려 풀로 붙이고, 투수와 홈런 등 주요 기록은 팀별, 개인별로 깨알같이 써내려가 일지를 만들었다. 매일 오전에 하는 이 작업은 숙련공의 기준으로도 1시간 가까이 걸렸고 10년 정도 계속됐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수작업으로 기록을 관리하던 시절이었다. 이보다 앞서 기자는 팬이던 때에도 스포츠 전문지를 매일 사봤다. 당시 땅표는 없었지만 투수와 타자 순위표를 보기 위해서였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투타 순위 변화를 좇는 게 경기를 실제 보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웠다. 그때 타율 상승에는 2타수 1안타(0.500) 3볼넷보다 5타수 2안타(0.400)가 더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제 국내 프로야구도 대부분 기록이 전산 처리된다. 메이저리그에 비해선 여전히 미흡하지만 기자 같은 기록 마니아라면 KBO 홈페이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놀다 갈 수 있게 됐다.
▶박찬호를 예로 들어보자. 메이저리그에서 동양인 최다승(124승)을 올린 박찬호가 국내 데뷔 무대에서 어떤 성적을 거둘지는 올해 프로야구의 최고 관심사다. 기자는 시즌 개막을 앞두고 39세의 박찬호가 선발로 20경기 이상 등판해 4점대 평균자책을 유지하고 한화의 전력을 감안할 때 패전이 더 많긴 해도 8승만 거두면 성공작이라고 봤다. 10∼12승에 3점대 평균자책이면 완전 대박. 반면 그 이상의 성적은 없을 것으로 확신했다. 많은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냉정해 보이기까지 하는 평가였다. 사실 대부분 야구 기자들은 마흔을 바라보는 박찬호가 선수 생활을 그리 오래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기껏해야 내년, 아니면 내후년까지. 야구 재벌 박찬호가 국내 무대에서 뛰는 것은 돈 때문은 절대 아니다. 연봉은 모두 유소년 야구 기금으로 냈다. 앞으로 지도자나 야구 관련 사업을 하기 위한 교두보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돼가고 있을까. 얼른 KBO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자. 박찬호의 이름을 찾아 클릭해보면 각종 기록과 순위가 뜬다. 일단 박찬호는 25일 현재 5경기에 선발 등판해 1승 2패에 머물렀지만 평균자책은 3.25(12위)로 수준급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낙관적인 수치들이 많이 보인다. 27과 3분의 2이닝을 던져 25개의 안타만 허용했고 장타는 2루타 2개, 홈런 1개밖에 안 된다. 피안타율은 0.243으로 13위. 탈삼진은 20개로 볼넷 허용 14개보다 많다. 5경기 가운데 3경기에서 퀄리티 스타트(6이닝 이상, 3실점 이하)를 해 이 부문에서도 공동 9위에 올라 있다. 이 정도면 팀의 에이스는 아니더라도 2선발급은 되는 셈이다. 승률이 0.333인 것은 아직까지는 별 문제가 아니다. 승운이 따르지 않은 탓이다. 13실점 가운데 3실점이 비자책점으로 규정 이닝을 채운 투수 가운데 가장 비율이 높다. 지난달 18일 LG전에선 눈부신 호투를 하고도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7회 홈런 한 방을 맞고 패전투수가 됐다. 지난달 24일 KIA전에선 투구 내용이 좋지는 않았지만 승리투수를 눈앞에 두고 내야진의 잦은 실책 때문에 4실점(1자책)하고 5회에 마운드를 넘겨야 했다. 두 경기에서 승운이 따랐다면 개막 3연승이 가능했다.
▶박찬호의 성적 가운데 또 하나 눈여겨볼 부분은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이다. 0.184(우타자는 0.296)로 좌타자 콤플렉스를 겪었던 메이저리그 시절과는 사뭇 다르다. 어린이날인 5일 삼성전에선 패전투수가 되긴 했지만 이승엽을 3타수 무안타로 돌려세웠다. 물론 이 현상은 앞으로 경기 수가 늘어나면서 완화되긴 하겠지만 5경기의 통계인 만큼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박찬호가 올해 좌타자에게 강한 이유는 변형 직구인 컷패스트볼이 위력을 떨친 덕분이다. 슬라이더가 좌타자의 바깥에서 안으로 휘어들어와 예측이 가능하다면 컷패스트볼은 직구처럼 들어오다가 스트라이크존 근처에서 좌타자의 몸 쪽으로 휘어지며 떨어져 직구인지 변화구인지 구별이 힘들다. 다만 좌타자 상대로 삼진(6개)보다 볼넷(8개)이 많은 게 옥에 티다. 박찬호는 피안타율이 주자가 있을 때 0.196이며 투아웃 이후 0.167, 4∼6번 타순을 상대로 0.212로 좋다. 이 밖에 KBO 홈페이지에는 없지만 올해 최고 구속은 시속 149km가 스피드건에 찍혔다.
▶반면 박찬호의 롱런 가능성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기록도 있다. 꼬박꼬박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선발 등판했지만 5경기의 평균 이닝은 6회를 넘기지 못했다. 이 정도면 그리 나쁜 상태는 아니다. 하지만 투구 수가 늘어날수록 급격히 떨어지는 구위가 문제다. 피안타율은 1∼3회가 0.192, 4∼6회가 0.244, 7회가 0.667로 올라간다. 선발투수가 80개 이상의 공을 던지기 힘들다면 감독의 입장에선 난감할 것이다. 평균 투구 수는 93.6개. 앞으로 체력보다 정신력으로 버텨내야 하는 여름철 무더위를 박찬호가 무난히 이겨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볼카운트별로는 스트라이크가 볼보다 많을 때, 즉 투수가 유리한 상황에서 오히려 0.433의 피안타율을 기록해 베테랑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기록은 단순히 숫자의 조합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한눈에 알아보긴 힘들지만 그 속엔 선수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압축돼 있다. 디지털을 아날로그로 변환해 색깔을 칠하고 의미를 더한 뒤 숨어 있는 스토리까지 찾아내는 작업. 이게 바로 수(數)포츠다. 박찬호는 이 기사가 마감된 날인 11일 오후 롯데와의 청주경기에서 6번째 선발 등판한다. 그의 미래 예측 지표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바뀔 것이다. 이번엔 독자들이 KBO 홈페이지에 들어가 그 변화를 흥미롭게 확인해 보시라. 그러나 무엇보다 변하지 않고 확실한 게 있다면 현역 최고령 투수 박찬호가 전문가들의 어두운 전망을 뒤엎고 시즌 초에 보여준 인상적인 투구와 카리스마다. 국내 복귀시기를 놓쳤다는 등 한때 야구인들에게 그리 환영받지는 못했던 박찬호이지만 그가 보여준 투혼만으로도 국내 야구계에 연착륙하는 것은 이미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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