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시대(1603~1867) 일본에는 ‘산킨코다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에도(지금의 도쿄)에 각 지방 영주(다이묘)의 부인을 살게 하고 다이묘 자신도 격년제로 일정 기간 머물게 한 것인데 목적은 하나, 세력 확장과 막부를 향한 발호의 원천 봉쇄다. 혼슈 남쪽의 큰 섬 규슈에도 당시엔 9개국이 있었다. 그중 동남방(현 미야자키 가고시마 현)은 휴가큐니로 에도까지 1600km 거리에 있다. 하루 30km씩 걸어도 53일 걸리는 먼 곳이지만 다이묘는 2년마다 오갔다. 그것도 수십 수백 명을 거느리고. 행렬은 화려했다. 위세를 뽐내려는 다이묘의 과당경쟁 탓이었는데 이 꼼수에 감춰진 요체가 바로 그것이다. 재정을 소모시켜 지방 군벌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쇼군의 의도다. 메이지 유신(1868)으로 봉건영주는 사라졌고 그 길엔 철도가 놓였다. 규슈에 철도시대가 열린 건 1891년. 하지만 혼슈 남단(시모노세키 역)과 규슈북단(모지항 역)의 바닷길에 철도를 놓는데는 51년이나 걸렸다. 1942년 11월에야 해저관통 간몬터널이 개통돼서다. 규슈의 남단은 가고시마(옛 사쓰마쿠니)다. 모지항 역과 이곳은 가고시마혼센이 잇는다. 규슈철도여행의 세 번째 이야기는 이 철도가 지나가는 남규슈 동쪽, 태평양쪽 해변 신화의 고장인 미야자키 현(동부)이다.》
건국신화를 담고 달리는 관광특급
숙소는 니치난 해안의 팜비치호텔. 니치난은 미야자키의 400km 해안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객실 창으로 북쪽 히도쓰바 해안의 높이 154m 타워(셰러턴 호텔)는 물론 정면의 아오시마(섬) 등이 막힘없이 전개됐다. 당시는 4월. 서울은 꽃샘추위로 겨울을 방불케 했지만 여기서는 파도타기가 시작됐다. 그날도 새벽부터 서퍼 십여 명이 바다를 수놓았다. 눈앞 아오시마는 오래도록 ‘금단의 섬’이었다. 하늘이 신을 왕으로 내렸다는 ‘덴손코린’(天孫降臨)신화의 무대여서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누구나 오간다. 니치난 해안에는 그런 신화의 성지가 또 있다. 절벽 바위굴의 ‘우도신궁’이다. 신화는 이런 내용이다.
천신(니니기노미토코)에겐 우미사치히코와 야마사치히코라는 형제가 있었다. 그런데 야마사치히코는 잃어버린 형의 낚싯바늘을 찾아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용왕의 딸과 결혼해 돌아온다. 아오시마가 물 밖으로 나온 장소다. 해산을 앞둔 용왕 딸은 굴(우도신궁)에 들어가며 절대로 엿보지 말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남편은 약속을 어겼고 부인은 낳은 아들을 버리고 용궁으로 돌아간다. 아기는 어미가 바위천장에 붙여 놓은 젖을 먹고 자란다. 훗날 그가 낳은 아들이 ‘일본서기’ 등에 최초의 왕으로 기록된 ‘진무’(BC 711∼585)다. 현재 왕은 그 125대손. 신궁의 주신은 용왕의 딸이자 진무왕의 할머니인 도요타마히메다.
토요일 오전 10시 29분. 아오시마 역에서 기차에 올랐다. ‘우미사치야마사치’(海幸山幸)라는 관광특급이다. 이름만큼 모습도 특이했다. 내부는 물론 외부까지 원목으로 장식됐다. 그 사연은 37분 후 도착한 오비에서 듣게 됐다. 오비는 봉건시대 작은 번(幡·봉건영지)으로 1558년 영주가 된 이토가(家)가 14대 280년간 줄곧 심고 가꾼 삼나무(오비스기)로 온 산이 뒤덮여 있었다. 그래서 2009년 운행을 개시한 이 관광열차도 오비스기로 치장했다. 선로는 미나미미야자키 역(미야자키 시내)∼시부 시(가고시마 현)의 니치난센(88.9km). 그중 풍치구간이 아오시마∼오비인데 니치난 해안과 오비 삼림을 지난다. 니치난 해안에는 미야자키의 주요 관광지가 포진했다. 빨래판 모습의 광대한 현무암해안(8km·일명 ‘귀신의 빨래판’)도 여기 있어 열차 안에서도 보인다.
‘남규슈의 작은 교토’ 오비
오비 역에선 사무라이와 하인 복장의 남자가 신녀 차림의 여인과 함께 승객을 환영했다. 오비의 랜드마크는 ‘오테몬’이라는 높이 12.3m의 2층 성문(1871년). 100년생 오비스기로 지은 문이다. 고적한 성안엔 영주저택이 있는데 민속박물관으로 꾸며졌다. 오비의 관광은 성안보다 성밖의 마을―조카마치(城下町)―이 더 재밌다. 작은 성인 만큼 느긋하게 산책하며 두세 시간 둘러보기에 적당했다. 마을은 무사가옥과 고택으로 예스러웠다. ‘남규슈의 작은 교토’라고 불리는 이유다.
성 앞 관광안내소에선 ‘오비성 주변 사적과 상점 둘러보기’ 안내장을 판다. 1000엔짜리는 무료입장(5곳)에 선물쿠폰(5장)이, 600엔짜리엔 쿠폰만 있다. 안내장은 선물 주는 상점을 찾아다니다 보면 자연스레 마을투어가 되도록 만든 것이다. 그런데 공짜선물이 기대 이상으로 좋아 오비는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부엉이인형과 갓 구운 맛있는 빵에 100년도 더된 간장집의 시제품은 물론 일본서도 쉽사리 맛보기 힘든 ‘아쓰야기다마코’(계란을 프라이팬에 구워 카스텔라처럼 요리한 것)까지…. 총액이 2000엔을 훨씬 넘는단다.
니치난 특산요리 ‘가쓰오 아부리주’
에키벤(열차도시락)은 일본 철도여행의 매력 중 하나. 니치난센에서라면 미나미미야자키 역의 ‘표고버섯 밥’(미나미미야자키 역)이 강추다. 하지만 내가 탄 아오시마 역에선 구할 수 없다. 그래도 실망하지 말자. 오비에 그걸 능가할 게 있으니까. ‘니치난 이폰쓰리 가쓰오 아부리주’라는 한 상차림 메뉴다. 풀이하면 ‘니치난에서 외줄낚시로 잡은 가쓰오(가다랑어)덮밥’이다. 가다랑어는 일본 근해에 흔한 생선(농어목 고등엇과)으로 1월만 빼고 연중 잡힌다. 철마다 맛이 달라 이름도 철따라 바뀐다. 초봄엔 하쓰가쓰오, 여름엔 혼가쓰오, 가을엔 모로리가쓰오…. 일본에선 요즘 각 지역이 특산물 요리를 공동 개발한 뒤 식당을 지정하고 저마다 비장의 레시피로 맛은 업그레이드시키되 메뉴만큼은 ‘공식 브랜드’로 표기하는 향토음식 마케팅이 유행이다. 이것도 그런 니치난 특산요리로 개발된 것인데 11곳에서 판매(1200엔으로 동일) 중이다.
내가 찾은 곳은 ‘갸라리 고다마’(갤러리 고다마). 오비 성 진입로의 ‘쇼닌도리’(상가로)에 있는 고택이었다. 상차림은 간소했다. 그러나 먹을 건 푸짐했다. 가쓰오는 회로 두툼하게 썰어 접시에 담아낸다. 그 옆 마늘간장과 참깨소스는 생선용이다. 아쓰야키다마고, 쓰케모노(염장야채), 조개 넣고 끓인 미소시루(된장국)도 밥과 함께 나왔다. 상엔 벌건 숯이 담긴 1인용 화로가 있다. 가쓰오 생살을 소스에 묻혀 굽기 위한 것이다. 이 식당의 미식 포인트는 ‘가쓰오 삼종세트’. 즉 회, 구이, ‘생선 자즈케’―생선을 밥에 올린 뒤 찻물에 말아 함께 먹는 것―로 맛보기다. 생선 자즈케의 묘미는 맛보지 않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은근히 입을 당기는 그 맛은 누구나 좋아할 만하다.
해안 관광지는 관광버스로
해안의 관광지는 하루 한 번 출발하는 관광버스(니치난 호)로 둘러본다. 해안의 경관도로 ‘기라메키(光輝)라인’ 드라이브까지 겸하니 일석이조다. 아오시마와 우도신궁은 신화에 관심 없더라도 가보자. 주변 바다풍광이 아름다워서다. ‘귀신의 빨래판’ 해안은 아오시마에서도 만난다. 우도신궁 부근 해안의 ‘선메세 니치난’은 이스터 섬 밖에 있는 세계 유일의 모아이(과대한 두상의 돌조각) 조각공원이다. 칠레 정부의 허락 하에 실물처럼 조성한 모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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