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꽃병만이 아니다. 술병도 평화다. 애주가가 취중에 한 농담일까? 하지만 이건 농담이 아니다. 적어도 한자 문화권에서, 특히 민화에서는 이 논리가 아무런 충돌 없이 성립된다. ○ 발음이 같아 의미도 같다
왜 그런지를 한번 살펴보자. 무대는 톈안먼(天安門)사태 1주년을 하루 앞둔 1990년 6월 3일 중국 베이징. 다음은 당시 일어난 일을 설명한 6월 4일자 동아일보 기사의 일부다.
‘중국의 민주화시위가 유혈 진압된 천안문(天安門)사태 1주년을 맞아 북경대(北京大) 학생 1천여 명이 교내에서 3일 밤 늦게부터 4일 새벽 사이에 이붕(李鵬) 총리 등 현 정권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중략) 북경대 학생들은 3일 자정 경부터 기숙사에서 창문 밖으로 등소평(鄧小平)을 비난하는 뜻으로 빈병(‘小平’이란 이름은 중국어 발음으로 작은 병을 뜻하는 ‘小甁’과 비슷)과 돌 등을 던지면서 시위를 시작. 이들은 “봉기하라, 봉기하라 북경대여, 두려워 말라” “앞으로 나가자, 우리를 쏘아라” “이붕을 몰아내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시위를 벌였다.’
요약하자면, 학생들이 등소평(덩샤오핑)을 비난하기 위해 그의 이름과 같은 발음의 ‘소병(샤오핑)’을 던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은 병을 던지는 것은 곧 등소평을 모독하는 상징적인 행위가 된다.
마찬가지로 꽃병이 평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어에서는 꽃병(花甁)의 병(甁)과 평안(平安)의 평(平)이 모두 핑(pi´ng)으로 발음된다.
○ 만사형통의 꽃병그림
꽃병에 꽂혀 있는 모란을 그린 아름다운 정물화 한 폭이 있다. 조선민화박물관에 소장된 ‘모란화병도(맨 오른쪽 위 그림)’다. 이 꽃병 그림은 일상의 단면을 묘사한 서양의 정물화와는 성격이 다르다. 단순히 사물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갖가지 상징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꽃병에 차고 넘치는 모란은 부귀를 상징한다. 목도리 같은 천을 둘러 운치를 낸 청화백자 꽃병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평안’과 ‘평화’를 뜻한다. 따라서 이 모란 꽃병 그림은 집안이 평안하고 부귀하기를 소망하는, 길상의 그림인 셈이다.
이번엔 ‘화조도’(일본민예관 소장, 오른쪽 그림)를 살펴보자. 장군(술, 간장 등 액체를 담아서 옮길 때에 쓰는 그릇) 모양의 화병 위에 물 위에 세운 건물과 새 그림이 있다. 화병 주둥이 주위에는 햇무리와 같은 붉은 기운이 서려있고, 공작 두 마리가 이를 지키고 있다. 척 봐도 예사롭지 않다. 추측하건대 장수를 상징하는 ‘서왕모(西王母)’의 신선세계를 묘사한 것이리라.
꽃병에는 삐쭉한 꽃잎의 연꽃과 터번 모양의 모란꽃이 꽂혀 있다. 꽃 주위에는 나비가 날아들었다. 연꽃은 출세, 다산, 평화 등 만복을 기원하는 꽃이 아니던가. 이 그림에도 역시 집안이 부귀하고 행복하며 평안하기를 바라는 기원이 충만하다. 그야말로 ‘만사형통’을 바라는 그림이다.
꽃병 그림은 집안을 아름답게 장식할 뿐 아니라, 그 안에 가정을 평안하고 행복하게 꾸리려는 바람이 깃들어 있다. 지금이라도 꽃병 그림, 아니면 진짜 꽃병을 구해 집안을 꾸며 보는 것은 어떨까.
P.S. 같거나 비슷한 한자 발음과 그 상징성을 이용한 표현 방식은 다른 민화에서도 나타난다.
갈대와 기러기를 그린 그림을 ‘노안도(蘆雁圖)’라 한다. 여기서 갈대와 기러기를 뜻하는 ‘노안(蘆雁)’은 늙어서 편안해진다(老安)와 발음이 같다. 따라서 노안도는 주로 노인들을 위한 선물이나 그들의 방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궐어도(궐魚圖)’는 쏘가리를 그린 그림이다. 쏘가리를 나타내는 ‘궐(궐)’자의 발음이 궁궐(宮闕)의 ‘궐’자와 같다. 이 그림은 본인이나 자식이 궁궐에서 근무하기를 바라는, 즉 출세를 원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가구나 자수 같은 것에 많이 사용된 박쥐 문양도 한자의 발음과 큰 연관이 있다. 박쥐는 한자로 ‘편복(편복)’이라 쓰는데, ‘복’자의 중국 발음은 푸(f´u)다. 이는 ‘행복할 복(福)’자의 발음과 같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박쥐=복(福)’이라 여겼다. 박쥐 그림이나 무늬가 행복의 상징이 된 이유다.
풍속에도 비슷한 예가 있다. 예전에 정월 8일은 패일(敗日)이라고 해 남자들이 외출하지 않는 기일(꺼려야 할 불길한 날)로 여겨졌다. ‘여덟 팔(八)’자와 ‘질 패(敗)’자의 중국 발음이 비슷해서였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