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경험했거나 주변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음 직한 상황이다. 남자들은 대개 B처럼 생각하기 마련이다. 스트레스는 그저 명품을 사기 위한 ‘핑곗거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A는 남자친구에게 거짓말을 하는 걸까.
미안한 얘기지만 틀린 건 B다. 다시 말해 스트레스는 명품에 대한 유혹에 빠지거나 충동구매를 하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다. 적어도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가 여준상 동국대 교수(경영학)와 함께 한국인의 마음을 살펴본 바에 따르면 그렇다. 대홍기획(콘텐츠 기획)과 엠브레인(설문 실시)이 파트너로 참여한 이번 조사는 전국의 20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신뢰수준 95%, 오차 범위 ±4.27%)으로 했다. 모든 질문은 5점 척도로 물었다. 이하에 표기된 숫자들은 전체 응답자 중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변(‘매우 그렇다’ ‘그렇다’)한 사람들의 비율이다.
○ 상처받은 마음을 소비로 치유한다
응답 여성 중 절반(50.0%)은 평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역시 비슷한 수(48.6%)가 자신의 내면에 상처가 많다고 여겼다. 이런 생각은 20대 여성(스트레스 60.0%, 내면 상처 62.3%)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그래서일까. 20대 여성들은 충동구매 성향(33.1%)과 특정 물품의 소비에 중독되는 성향(33.8%)이 동년배 남성들(17.1%, 23.8%)은 물론이고 30대 여성(19.3%, 16.4%)보다 훨씬 강했다. 명품에 대한 유혹(17.7%)도 상대적으로 쉽게 느꼈다. 소비자조사 전문가인 SK마케팅앤컴퍼니의 이영진 매니저는 “강한 소비 성향 때문에 최근 많은 기업이 마케팅 타깃을 아예 20대 후반의 여성으로 정해놓고 시작한다”고 전했다.
이것만 놓고 보더라도 스트레스나 사회적 상처는 소비행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응답자들의 내적 요인과 소비행동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해 본 결과에서도 결론은 같았다. ‘스트레스’ ‘내면상처’ ‘타인으로부터의 상처’ 등은 ‘충동구매’와 ‘명품유혹’을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이었다. 물론 이런 관련성은 20대 여성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30대 남성과 여성, 50대 여성도 스트레스나 상처를 많이 받을수록 충동구매 성향이 강해지고, 명품에 대한 유혹도 강하게 받았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왜 ‘지름 신(神)’이 강림하는 걸까. 오스트리아의 사회심리학자 프리츠 하이더(1896∼1988)가 주창한 ‘균형이론’(Balance Theory)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늘 균형적 심리상태를 원한다.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적 불균형 상태가 되면 스스로에게 즉흥적 ‘보상’을 내림으로써 빠른 회복을 시도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동안 못 본 체했던 명품가방에 수백만 원을 쓰고, 홈쇼핑을 보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덜컥 주문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전우영 충남대 교수(심리학)는 “사람들은 ‘나도 이런 걸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명품을 산다”며 “그런 행위가 곧 사회적 스트레스에 대한 보상의 성격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사회로부터 상처를 받았거나 배제됐을 때 개인의 자존감은 크게 하락하게 된다. 떨어진 자존감을 되살리는 데 명품만큼 직접적이고 큰 효과를 내는 대상은 없다는 것이다.
힘겹게 다이어트를 하던 중 연인과 심하게 싸우면 곧바로 ‘단 것’을 찾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번 조사에서도 스트레스나 내면의 상처가 큰 사람일수록 달콤한 음식을 자주 찾는다고 답해 그 연관성이 통계적으로 입증됐다. 여기에는 정신적인 에너지 소모가 큰 상태에서 당분을 섭취함으로써 에너지를 빨리 보충하려는 의도도 함께 숨어 있다.
김현택 고려대 교수(심리학)는 중독적인 소비행동도 도박과 같은 행위중독의 일종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스트레스를 받은 인간의 몸은 엔도르핀을 활성화시켜 정신적, 신체적 ‘무통(無痛)’ 상태가 되려고 한다”며 “이를 위해 약물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 약물중독인 것이고, 쇼핑에 빠지면 쇼핑중독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외로우면 추억을 찾는다
요즘 몇몇 식당에서는 ‘추억의 도시락’이라는 메뉴를 판매한다. 누런 사각형 도시락에 밥을 담고, 계란을 하나 얹은 뒤 김치와 함께 흔들어 먹는 음식이다. 맛도 맛이지만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과 함께 책상 앞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까먹던 옛 추억을 떠올리면 누구나 입가에 웃음을 짓게 된다. 아예 1980, 90년대에 문방구에서 팔던 물건만 파는 상점도 많이 생겼고, TV에서는 ‘7080 콘서트’가 인기다.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년)는 노스탤지어 영화의 대명사가 됐고, 꼭 10년 뒤 강형철 감독의 ‘써니’(2011년)도 대박을 쳤다.
사람들은 이렇듯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참 좋아한다. 이번 조사에서 눈길을 끌었던 점은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상품에 관심이 많다’는 문항에서 남자(37.0%)가 오히려 여자(30.8%)보다 긍정적 답변을 많이 했다는 사실이다. 연령대별로 봤을 때 ‘노스탤지어’에 대한 동경이 20대(43.1%)에서 가장 크다는 것도 눈길을 끌었다.
그렇다면 스트레스나 상처는 추억에 대한 동경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영국 사우샘프턴대 연구팀(팀 와일드처트 등)은 2006년 ‘성격과 사회심리학’에 “외로운 사람일수록 노스탤지어 추구가 강해진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2010년에는 국제학술지 ‘소비자연구’에 “추억이 어린 상품(nostalgic product)은 그 시대를 함께 보낸 타인과 공유가 가능해 ‘사회적 소속감’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연구팀(캐서린 러브랜드 등)의 논문이 실렸다. 이런 기존의 연구결과들은 이번 조사에서도 재차 입증됐다. 남성의 경우 스트레스 및 타인에게서 받은 상처와 ‘추억상품 구매’ 간의 상관관계가 20∼40대에서 모두 강하게 나타났다. 여성의 경우는 스트레스와는 상관성이 없었지만, 내면의 상처나 타인에게서 받은 상처가 추억상품 구매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분석됐다.
전 교수는 “아카데미상 후보에만 올랐던 사람들보다 실제 트로피를 받은 사람들이 더 오래 산다는 연구결과가 있었다”며 “트로피가 자신이 잘나갔던 시절을 회상하도록 해 그 사람의 자존감을 유지시키는 데 도움을 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의 스트레스로 생긴 정서적 불균형이 과거의 추억 덕분에 회복된다는 뜻이다.
한편 조사결과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독특하고 별난 제품(19.4%)보다는 튀지 않는 무난한 제품(50.1%)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다. 디자인 측면에서도 화려한 것(12.5%)보다는 단순한 것(45.6%)을 더 좋아했다.
그런데 심리적 타격은 일상적인 것과 반대의 성향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파악된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내면의 상처가 있다’ ‘타인에게서 상처를 자주 받는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하다’고 답한 사람일수록 무난한 제품보다는 독특하고 별난 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다. 유승엽 남서울대 교수(광고홍보학)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타인으로부터 수용 받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있고, 한국인은 그런 문화심리학적 특성이 더 강하다”며 “이것이 바로 보통 사람들이 무난하고 단순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스트레스나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독특한 모양이나 디자인의 물건을 사는 행동은 자존감 회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싸거나, 독특하거나, 화려한 물건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일종의 ‘심리적 파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사람 마음이란 참 복잡한 것 같다. 그래서 상관관계 분석과 별개로 조사 대상자들에게 아예 단도직입적 질문도 던졌다.
“당신의 소비행동은 스트레스 해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까?”
대답은 이랬다. 남자의 17.6%, 여자의 30.0%가 ‘그렇다’고 했다. 특히 20대 여성은 절반(46.9%)이 ‘스트레스 풀기용 쇼핑’을 실토했는데 이는 50대 남자(9.5%)의 5배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여준상 동국대 교수 marnia@dg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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