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하게 솟아오른 빌딩 숲 사이로 행인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반쯤 정신이 홀린 듯 앞만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그가 머무를 곳은 없었다. 흡사 마네킹이 된 기분. 모두 나침반을 손에 쥐고 있는데 혼자만 맨손인 기분. 그만큼 막막하고, 또 외로웠다.
그런데 이상했다. 우울한 마음 한편에서 가슴이 미친 듯 쿵쾅거렸다. 아메리칸 드림? 그땐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그건 그냥 생존본능이었다. 그 본능이란 놈이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올라와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시작이라고, 그리고 청춘을 이곳에 바치라고.
○ 364일 근무… 성탄절에만 쉬었다
1983년 미국 뉴욕 맨해튼. 19세의 한국인 청년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에 온 첫날 길거리 벤치에 앉아 온몸으로 생존본능을 느꼈다. 그의 손에는 점심거리로 사온, 차갑게 식은 싸구려 샌드위치가 들려 있었다.
한국에서 그는 평범한 아이였다. 아침에 부모님이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5분만 더”를 외치다 지각하고, 친구가 좋아 수업 도중 몰래 ‘땡땡이’를 치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가족이 미국으로 떠나게 됐다. 미국 생활은 너무 힘들었다. 가뜩이나 낯선 땅인데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 게다가 5남매의 장남이란 짐이 어깨를 짓눌렀다.
낮에는 대학에 다니면서 밤늦도록 일을 했다. 택시 운전부터 생선가게 점원, 채소 운반, 샌드위치가게 아르바이트 등 안 해본 게 없었다. 학비를 벌고 생활비를 마련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단지 생존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꿈이 있었기에 악착같이 살았다. ‘내일은 좀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는 간단하고 소박한 꿈. 그것이 그의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악착같이 7년 동안 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1989년 뉴욕 센트럴파크 인근에 15평(약 49.6m²)짜리 샌드위치가게를 열었다. 매일 오전 5시에 나와 준비를 끝내고 6시에 문을 열었다. 문 닫는 시간은 오후 9시. 정리하고 집에 가면 항상 11시가 넘었다. 연중무휴로 장사를 하던 그가 쉬는 날은 딱 하루, 성탄절뿐이었다. 그것도 쉬고 싶어 쉰 게 아니라 단지 성탄절엔 장사가 잘 되지 않아 가게 문을 닫은 것이었다.
그렇게 샌드위치를 팔며 앞만 보고 달려온 청년은 지금 뉴욕 맨해튼에서 가장 큰 샌드위치 전문점 ‘레니스(Lenny’s)’를 운영하고 있다. 레니는 주세훈 레니스그룹 대표(48)의 영어 이름이다. 레니스 매장은 맨해튼에만 13개가 있다. 모두 본사 직영인 매장의 전체 직원은 600여 명. 지난해 판매한 샌드위치만 200만 개가 넘고 매출액은 4000만 달러(약 470억 원)를 훌쩍 넘는다. 레니스 매장은 금융인뿐만 아니라 유명 할리우드 스타, 스포츠 선수들까지 찾는 뉴욕의 명소다.
○ 직원 한국인이라고 우대하지 않아
세계 각국 음식의 격전지인 뉴욕에서 레니스가 성공 가도를 달리는 비결은 뭘까.
주 대표는 ‘변함없음’을 첫손에 꼽았다. “언젠가 토마토 흉작이 들었어요. 생산량이 줄어드니 값이 크게 뛰었죠. 그래도 우리는 비싼 값을 치르고 기존에 거래하던 토마토 농장에서 최고의 토마토를 사 왔어요. 한 달 수익을 생각하면 크게 손해지만 5년을 보면 약간 손해, 10년 뒤를 생각하면 그냥 스치는 정도이기에 멀리 보고 내린 결정이었죠.”
이 덕분에 다른 샌드위치보다 가격이 비싼데도 ‘레니스의 샌드위치는 항상 맛이 변함없다’는 입소문이 났고, 그것이 고객의 신뢰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주 대표는 한편으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그는 “난 아직도 샌드위치를 가지고 놀 때 가장 즐겁다. 고기 자르는 방식부터 재료 조합까지 끊임없이 변화를 주면서 항상 고객의 다양한 욕구를 건드려 본다”고 강조했다. 일본식 스시바 스타일을 접목해 주문한 샌드위치의 조리 과정을 고객이 직접 지켜볼 수 있도록 한 특유의 시스템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한국인의 눈썰미와 창의성은 세계 최고예요. 그런 재주를 썩혀두는 건 그 자체로 죄악이죠. 하루 10분이라도 뇌를 자극해 보세요.”
성공 비결로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직원교육이다. 레니스에선 샌드위치를 제대로 만들려면 6개월가량 걸린다. 물건 배달, 창고 정리 등에서 시작해 야채 다듬기, 고기 썰기 등 기본을 거치며 철저한 교육을 받아야 총주방장이 될 수 있다. 직장에 대한 직원의 만족도도 주 대표가 직접 챙기는 부분. “구글이나 애플의 직원 만족도가 높잖아요. 전 레니스를 요식업계의 구글이자 애플로 만들고 싶어요. 직원들이 회사에 만족하면 자연스럽게 제품과 고객 서비스가 좋아지겠지요.”
하지만 직원에 대한 평가는 엄격하다. “보통 한국인이 경영하는 음식 가게를 보면 한국인 직원을 우대하죠. 하지만 레니스는 브랜드에 대한 애정과 능력만 있다면 공정하게 기회를 줍니다. 대표인 제가 한국 사람이란 사실을 모르는 직원도 많아요.”
주 대표에게 물었다. 그의 사업 인생을 축구로 따진다면 얼마쯤 지난 것 같으냐고. “전반 30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종료 휘슬이 울리는 건 전 세계 누가 들어도 알 수 있는 명품 샌드위치 브랜드를 만들었을 때일 겁니다.”
주 대표는 여전히 적어도 3개월에 한 번은 모든 매장을 돌며 일을 돕는다. 쓰레기를 비우고 바닥을 쓸고 직접 배달까지 나간다. 단순히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처음 맨해튼에 와서 벤치에서 샌드위치를 먹을 때가 생각나네요. 그땐 참 배가 고팠죠. 그런데 전 지금 더 배가 고픕니다.” 그의 사업 인생에선 아직 전반전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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