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미터법은 프랑스혁명이 준 선물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2일 03시 00분


◇측정의 역사/로버트 크리스 지음·노승영 옮김/356쪽·1만8000원·에이도스

1957년 소련의 우주선 스푸트니크호 발사로 경악한 미국은 양국의 기술 격차를 따져보다 ‘측정 격차’가 큰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련은 일찌감치 미터법을 채택했고, 미국은 영국의 야드파운드법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사일은 정밀 측정이 핵심이며 우주시대에 허용 오차는 1억분의 1까지로 줄어들어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지금도 미터법을 따르지 않고 있다. 왜일까.

이 책을 보면 의문이 풀린다. 도량형은 과학의 영역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측정의 세계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인 미터법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산물이다. 봉건 영주들은 제각각인 도량형으로 농민을 억압했다. 혁명 세력은 도량형 통일이야말로 구체제를 타도하고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파리를 지나는 지구 자오선을 기준으로 기본 길이의 단위 ‘미터’를 만들어냈다.

프랑스는 도량형을 통해 프랑스의 혁명 정신을 세계에 전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터법은 프랑스 군대의 총검 뒤에서 행진했다’.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들은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는 전제조건으로 1960년대부터 미터법을 따랐다. 미국으로선 기준이 되는 자오선이 파리를 지나는 것이 못마땅한 데다 미터법이 아니어도 잘 살고 있으니 굳이 돈 들여 도량형을 개혁할 필요를 못 느낀 것이다.

도량형의 역사와 최근 진행되는 미터법 개정 작업을 망라한 것으로도 충분한데, 저자는 측정의 정교함보다 ‘왜 측정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후기까지 빼놓지 않았다. 그는 미국과 영국 물리학회 회원이면서 뉴욕 스토니브룩대 철학과 교수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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