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술취한 악마들, 인간의 ‘불편한 진실’을 비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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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5일 03시 00분


■ 무용 ‘드렁큰 루시퍼’ ★★★☆

‘드렁큰 루시퍼’에서 천으로 된 문에 엉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는 상황을 표현한 류장현씨. 사진작가 김두영 씨 제공
‘드렁큰 루시퍼’에서 천으로 된 문에 엉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는 상황을 표현한 류장현씨. 사진작가 김두영 씨 제공
2006년 23세의 나이로 동아무용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 류장현은 이미 자신만의 색깔이 분명했다. 눈썹과 입술에 피어싱을 하고 1970년대 미국 흑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아폴로 파마’머리로 멋을 낸 이 젊은이는 무대에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다룬 무용 ‘지워지지 않는 이름… 위안부’를 처절하게 연기했다. 수상 소감에서 그는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춤을 만드는 안무가가 꿈”이라고 말했다.

1∼3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LIG아트홀에서 공연한 ‘드렁큰 루시퍼’는 주목받는 안무가로 성장한 류장현이 올해 이 공연장의 상주예술가가 된 뒤 발표한 첫 작품이다. 국내 현대무용 작품으론 드물게 난해하지 않았고 객석의 웃음까지 끌어냈다.

객석으로 들어가는 통로부터 작품에 공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원래의 입구 대신 무대 뒤쪽에 반투명 막의 긴 통로를 설치하고,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는 조명을 달았다. 입장객에겐 불시착한 우주선을 탐사하는 듯 긴장감을 줬고 객석에 앉은 관객에게는 줄 지어 입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나 그 자체로 훌륭한 무대 장치가 됐다.

무대에서 권총을 가지고 놀던 류 씨가 객석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면서 본격적으로 공연이 시작됐다. 류 씨를 포함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얗게 분칠을 한 다섯 무용수는 제목처럼 술에 취한 악마들이었다. 처음엔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가볍게 장난을 치던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지하고 과격해졌다. 스티로폼으로 된 커다란 흰색 블록으로 자기 영역을 만들고, 상대방의 영역을 침해하고, 싸우고, 한 사람을 집단 폭행하고, 감금했다. 조명이 객석을 비추면 무용수들이 객석 바로 앞까지 몰려와 조명에 비친 관객의 반응을 그대로 따라했다. 이는 객석의 웃음을 유발했는데, 무대 위 악마들의 행동들이 인간의 모습을 모방했을 뿐임을 암시한 것이다.

흰 블록으로 바닥에 십자가를 만들고 류 씨가 그 위에 앉아 각종 패륜 범죄 뉴스를 전하는 TV 화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장면도 이런 공연의 맥락에선 적절했다. 같은 내용이 반복된 공연의 말미와 연극성을 강화하면서 음악에 몸을 움직이는 춤 공연의 매력이 덜했던 점은 아쉬웠다.

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
#공연 리뷰#무용#공연#드렁큰 루시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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