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행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덕을 과시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덕이 있게(有德) 된다는 의미로 노자(老子) 38장에 나온다. 한비자 ‘해로(解老)’ 편에도 나오는 이 말은 도가의 무위(無爲)의 철학적 성격을 정치적으로 해석한 것인데, ‘상덕’을 갖춘 군주는 굳이 밖으로 덕이 있다고 애써 나서지 않으며, 자연(自然)에 순응할 뿐 어떤 작위(作爲)보다는 무위의 이치를 터득한 자다. ‘하덕(下德)’을 가진 군주는 자연에 순응하는 것은 맞지만 의도적인 작위를 일삼는 자다. 덕(德)이란 내면적인 것이고, 스스로 얻어지는 것으로 무위함으로써 모여진 것이고, 무욕(無欲)의 상태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 노자의 관점이고 한비의 재해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군주란 나라를 순리대로 조용히 다스려야지 요란을 떨듯 다스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논리다. 앞에 나서서 설치는 군주야말로 하등(下等)의 군주밖에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좀 더 자신을 깊숙이 감추면서 어리석은(愚) 것처럼 하는 모양새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愚)’란 우매(愚昧)가 아니고 돈후박실(敦厚朴實·돈후함과 소박하고 성실함)의 의미로 천박(淺薄)이나 부화(浮華)와는 거리가 먼 개념이다. 군주가 고유의 덕을 잃지 않고, 새롭고 조화로운 기운을 이룰 수 있도록 부단히 덕을 쌓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즉 한비는 의도적인 다스림보다는 무위의 다스림(無治)을 이루는 것을 최상의 덕으로 보고, 군주가 그런 덕의 상태에 이르렀다면 술(術)로써 통치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파격적인 논지를 편 한비는 비록 자신의 사상의 축이 상앙의 ‘법(法)’과 신불해의 ‘술(術)’, 신도의 ‘세(勢)’였지만 그의 가슴에는 노자의 ‘무위자연설’이 깊이 박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한 것이다.
한비의 이런 시각은 한나라를 세우고 기고만장하던, 말을 타고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역생(易生)의 말을 경청(傾聽)했던 고조 유방(劉邦)이나 유학을 치국의 근본으로 삼으면서 ‘겉으로는 도가요 안으로는 법가(外道內法)’를 유지한 한무제(漢武帝)의 통치 스타일에 접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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