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은 우리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 남는 한이 있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경배의 대상이다.”(3차 십자군을 이끈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가 살라딘에게 보낸 편지)
“예루살렘은 너희의 것인 동시에 우리의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더욱 더 거룩하다.”(십자군 침략에 맞선 아랍의 전사 살라딘이 리처드에게 보낸 편지)
하나의 신이 사는 집, 두 민족의 수도, 세 종교의 사원.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을 일컫는 말이다.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지만 이곳은 단 한순간도 평화를 누린 적이 없다. 여름엔 태양이 작열하고, 겨울엔 살을 엘 정도로 바람이 매서우며, 물은 항상 부족하고, 곳곳에 산재한 돌산으로 지형이 험해 살기에 좋지 않다. 구약성서에 표현된 ‘젖과 꿀이 흐르는 땅’과는 거리가 멀지만, 3000여 년 전 다윗이 왕국을 건설한 이후 이곳을 소유한 사람들마다 영원히 이 땅을 갖고자 했고 그러지 못한 이들은 빼앗고자 했다. 이 도시의 운명은 왜 이래야만 했을까. 무엇이 이 땅을 이토록 소유욕에 불타게 하는 도시로 만든 것일까.
예루살렘에 살고 배회했으며 소유하고자 했던 수많은 민족과 개인의 역사를 연대기식으로 풀어놓은 이 책은 이 같은 질문에 충분한 답을 내놓는다. 저자는 역사학자로 시온주의(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려는 유대인 민족주의 운동) 선구자인 모지스 몬티피오리 경의 후손. 그는 먼저 오랫동안 민족과 종교를 망라해 방대한 자료 조사를 했다. 그 결과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탄생에서부터 십자군 전쟁과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의 역사를 세밀하게 담았다. 유대인이지만 종교적 치우침과 민족적 편견 없이 최대한 객관적으로 저술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 예루살렘을 소유한 역사가 있다. 유대인들은 다윗 왕이 이곳을 수도로 삼기 이전부터 예루살렘에 거주해 왔다. 스스로를 신의 축복을 받은 민족이라 자부해온 이들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지배하에서도 살아남아 때로는 핍박을 받고 때로는 화합하며 명맥을 유지했다. 외국으로 흩어진 유대인들도 언젠가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스도교의 예루살렘에 대한 사랑은 당연했다. ‘예수가 죽음을 당하고 부활한’ 이곳은 그들에게 최고의 성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교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예루살렘은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 하늘로 승천한’ 곳이다. ‘11세기에 시작돼 1000년을 이어오고 있다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간 ‘십자군 전쟁’은 인간의 의지를 넘어 (그 각자에게는) 신의 뜻이었다.
세 종교가 종교의 이름 앞에 얼마나 맹목적이고 무자비하며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읽어보면 때로 소름이 끼친다. “시신 훼손은 마치 성체 의식과도 같았다. 십자군은 살육으로 배가 불렀다. 귀족과 사제들은 성묘교회로 가 그곳에서 예수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제단에서 목욕을 했다.”
저자는 현재의 예루살렘을 ‘매일 해가 뜰 때마다 세 종교의 세 성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생명을 얻는’ 곳으로 표현했다. 오늘날엔 3자간의 타협으로 얼마간의 공존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예루살렘에 해가 뜨기 한 시간 전이다. 바위 돔(이슬람 신전)이 열렸다. 무슬림들이 예배하고 있다. 서쪽 벽(통곡의 벽·유대교 순례지)은 언제나 열려 있다. 유대인들이 기도하고 있다. 성묘교회(예수가 죽음을 맞이한 후 안장된 묘지에 세워진 교회)가 열렸다.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언어로 기도하고 있다.”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세 종교가 이토록 예루살렘을 차지하려고 한 건 ‘최후의 심판’ 때 이곳에 묻힌 이들이 가장 먼저 구원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000년간 종교를 앞세워 행해진 무자비한 살상은 ‘최후의 그날’을 연상케 한다. 구원 없는 최후의 심판이 오늘도 예루살렘에서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