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joy]남한산성 한바퀴 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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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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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하늘이 내린 요새, 하늘마저 버렸었구나

남한산성 성곽을 따라 한가롭게 오가는 시민들. 소나무숲 바람소리가 우렁우렁하고, 성곽 돌담 틈새에 푸른 풀꽃들이 여기저기 돋았다.
 그 춥던 병자년(1636) 겨울, 조선 선비 정온(1569∼1641년)은 ‘하루 종일 천둥 같은 대포 소리’를 들으며 자결을 
생각했다. 그는 무력했다. ‘세상살이 기구한 일도 많구나/ 포위 속에서 한 달을 지내다니/내 한 몸이야 아까울 것 없다만/천승의 
나라가 다하였으니 어찌 할꼬/밖에는 근왕병이 끊기고/조정에는 매국노가 많도다/늙은 신하 무엇을 일삼을까/허리춤에 서슬 퍼런 칼을 
찼노라.’ 정온은 자결에 실패했다. 끝내 살아서 치욕의 현장을 봐야만 했다. 그는 분노와 수치심을 가슴에 안고 산간에 숨어 
살았다. 남한산성=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남한산성 성곽을 따라 한가롭게 오가는 시민들. 소나무숲 바람소리가 우렁우렁하고, 성곽 돌담 틈새에 푸른 풀꽃들이 여기저기 돋았다. 그 춥던 병자년(1636) 겨울, 조선 선비 정온(1569∼1641년)은 ‘하루 종일 천둥 같은 대포 소리’를 들으며 자결을 생각했다. 그는 무력했다. ‘세상살이 기구한 일도 많구나/ 포위 속에서 한 달을 지내다니/내 한 몸이야 아까울 것 없다만/천승의 나라가 다하였으니 어찌 할꼬/밖에는 근왕병이 끊기고/조정에는 매국노가 많도다/늙은 신하 무엇을 일삼을까/허리춤에 서슬 퍼런 칼을 찼노라.’ 정온은 자결에 실패했다. 끝내 살아서 치욕의 현장을 봐야만 했다. 그는 분노와 수치심을 가슴에 안고 산간에 숨어 살았다. 남한산성=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난리 속에 남북으로 부평처럼 흩어졌으니
이렇게 아주 갈 줄이야 뉘 알았으리까
어머님 이별할 땐 두 아들이 절했는데
올 때는 한 아들이 홀로 뜰에 나아가리

이승에서 어느 길로 다시 문안드리리까
외로운 신하 의리 발라 부끄러운 마음 없고
성주의 은혜 깊어 죽음 또한 가벼워라
다만 이승에서 한없이 슬픈 것은
동구에서 기다리실 어머니 정 버림이오

―청나라로 끌려가던 삼학사 오달제(1609∼1637)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시’에서
남한산성은 한양도성의 목젖이다. 백제 통일신라 고려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을 잃으면 한강을 잃고, 한반도 허리를 통째로 내줘야 했다. 그만큼 남한산성은 ‘하늘이 내려준 요새’ 즉 ‘천작지성(天作之城)’이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가운데 부분은 평평하다. 하지만 빙 둘러싸고 있는 바깥 산들은 삐죽삐죽 높고 험하다. 마치 산꼭대기에 왕관을 씌운 것 같다. 안에서 살기는 편하지만, 밖에서 넘보기는 힘들다. 더구나 성안에는 어딜 파도 물이 샘솟는다. 1636년 병자호란 때도 청나라 군대가 성을 끝내 함락하지는 못했다. 인조가 스스로 나가 항복했을 뿐이다.

인조는 1636년 음력 12월 14일 한밤 송파나루에서 강을 건너 새벽에 남한산성 남문으로 들어갔다. 세자와 신하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는 그곳에서 딱 46박 47일간 머물며 스스로 ‘독 안의 쥐’가 되었다.

청나라 12만 군대는 남한산성을 겹겹이 둘러싼 채 ‘스스로 지치기’를 기다렸다. 청군은 벌봉(515m), 한봉(418m), 검단산 신남성(520m) 꼭대기에서 대포를 쏘아댔다. 당시 남한산성은 현재 본성에만 성을 쌓았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은 성안을 훤히 내려다보면서 행궁 쪽에 집중포화를 해댔다. 행궁기둥이 대포에 맞아 부러졌다(병자호란 뒤인 숙종 때 비로소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신축).

성안엔 조선군 1만3800명, 문무백관 200여 명, 서리 100여 명, 노복 300여 명 등 모두 1만4300여 명이 맞서고 있었다. 조선군은 주로 소규모 게릴라전을 펼쳤다. 밤에 갑자기 문을 열고 나가 청군 10∼20명을 사살하는 식이었다.

청군은 끈질기게 옥죄었다. 성안의 조선군과 밖의 근왕병 연락을 막기 위해 주요 길목에 목책을 세웠다. 그러면서 수시로 5000∼1만 명의 군대로 파상공세를 펼쳤다. 조선군은 점점 지쳐갔다. 추위는 살을 다. 사람과 말 모두 굶주림에 허덕였다. 야윈 말을 잡아 병사들에게 배급해 줄 수밖에 없었다.

1637년 음력 1월 22일 강화성이 함락됐다.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강화로 피했던 빈궁들과 왕자들도 예외가 없었다. 조정이 술렁였다. 주화파와 척화파가 맞섰다. 1월 23일 행궁 밖에선 장수와 사졸들이 척화파(오달제 홍익한 윤집의 삼학사와 김상헌 정온)들을 청나라 진영에 보내라고 아우성쳤다. 징을 치고 북을 울리며 발을 굴렀다. 1월 28일 척화파 김상헌 정온이 자결을 시도했고, 29일엔 척화파 윤집 오달제가 묶여 적진에 보내졌다.

1월 30일 인조는 송파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태종 앞에 삼배구고(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기를 3번, 이것을 한 단위로 3번 되풀이)하였다. 그리고 다시 강을 건너 한양도성의 창경궁으로 돌아갔다.

남한산성은 한양도성의 닮은꼴이다. 동서남북 4대문으로 이뤄진 본성은 7.545km(외성·옹성 포함 12.3 55km)로 수원화성 5.7km보다 약간 길다. 본성 성곽 안쪽을 따라 한바퀴 도는 데 3시간이면 충분하다. 외성인 봉암성과 그 오른쪽으로 이어진 성곽까지 돌아도 4시간 정도면 넉넉하다. 성 바깥쪽으로 돌면 이보다 더 걸린다. 성곽을 쌓은 돌은 남한산성에서만 나는 호랑이가죽무늬의 호피석이다.

남한산성 정문은 남문(지화문·至和門, 해발 370m)이다. 인조도 그 문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엔 송파와 가까운 서문(우익문·右翼門, 해발 450m)으로 나갔다. 북문은 전승문(全勝門). 아이로니컬하게도 김류의 정예병 300명이 그 문을 열고 나가 싸우다 전멸했다. 후에 정조는 이곳에 와서 “장수가 경솔하게 적에게 속아 전멸하다니 가련하다”고 말했다.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다.

남한산성 비상출입문인 암문(暗門)은 16개가 있다. 북한산성은 가사당, 부왕동, 청수동암문 등 7개. 큰 문은 누각이 있고 출입구도 아치형이지만, 암문은 누각이 없고 모양도 사각형이다. 글자 그대로 ‘그늘 문’이다.

남한산성 성곽 길은 험한 바윗길이나 가파른 곳이 거의 없다. 아이들 손잡고 트레킹하기 딱 좋다. 어르신들의 발길이 붐비는 이유다. 휴일엔 1만여 명(지난해 320만 명)이 찾는다. 역사공부까지 할 수 있어 일석이조. 수어장대 부근, 서문∼북장대터 길과 북문∼암문 길옆엔 소나무들이 우뚝우뚝 서 있다. 울퉁불퉁한 껍질이 용 비늘 같다. 맑은 솔바람소리가 세상 때에 찌든 영혼을 씻겨준다.

남한산성도 한양도성과 마찬가지로 구색은 다 갖추었다. 임금의 숙소인 252.5칸짜리 행궁(북한산성 행궁 120칸, 수원화성 행궁 576칸)과 지휘본부 장대(將臺), 종묘, 사직, 관아, 감옥, 객사, 종각 등 없는 게 없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최근 복원이 완료됐다.

군사들 숙소인 군포 125개, 절 9개(북한산성 12개), 우물 80개(북한산성 99개), 연못 45개(북한산성 26개)가 있었다. 심지어 비상시에 땔감으로 쓸 숯과 소금도 가마니에 담아 곳곳에 묻어두었다. 남한산성 내엔 벼농사 지을 논도 제법 있었다.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이제 지구상에 흔적도 없다. 그들에게 끌려간 60만 조선백성도 자취가 사라졌다. 살아남아서 강한 것인가 아니면 강해서 살아남은 것인가. 역사는 말이 없다.
▼ 인조 업고 피난한 서흔남, 천민신분서 당상관 올라 ▼

임금이 잠을 자던 행궁 내행전.
임금이 잠을 자던 행궁 내행전.
서흔남은 남한산성 서문 밖 널무니에서 태어난 천민 출신이다. 기와 잇기와 불쟁이(대장간)로 생계를 꾸렸다. 무당, 왈짜, 무뢰배, 장사꾼 등 밑바닥 생활이라면 안해 본 것이 없었다. 그의 이런 이력이 전쟁 통에 큰 위력을 발휘했다. 그는 성밖 조선군과의 연락병을 자원했다. 성밖은 청나라 군대가 철통같이 포위하고 있어서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세 번이나 성밖을 오가며 인조 임금의 어명을 곳곳에 하달했다. 영남관군에게 군령을 전달하기도 하고, 성밖 신하들의 전갈을 받아오기도 했다. 그는 청나라 군인으로 변장하기도 했고, 때로는 걸인행세를 하면서 성 안팎을 오갔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인조와 그의 첫 만남이 흥미롭다. 1636년 음력 12월 14일 밤 인조는 간신히 송파나루에서 강을 건넜다. 하지만 남한산성까지 들어가려면 아직 아득했다. 그곳까지 인조는 신하들의 등에 업혀 왔다. 하지만 이제 신하들도 너무 지쳐서 주저앉기를 거듭했다. 추위는 뼛속까지 시렸고, 하늘에선 눈까지 대책 없이 쏟아졌다. 그때 불려온 게 서흔남이었다. 서흔남은 오자마자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더니, 인조를 업고 한달음에 남한산성 남문에 닿았다. 인조가 물었다. “왜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느냐?” 그가 대답했다. “이래야 청나라 군대가 뒤쫓아 오지 못합니다” “허허,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입고 계신 옷(곤룡포)을 벗어주셨으면 합니다.”

서흔남은 노비 신분에서 일약 당상관에 올랐다. 통정대부가 되었다가 나중에 가의대부로 제수됐다. 효종 2년에는 남한산성 성벽과 4대문 문루 보수공사에도 참여했다. 그는 죽을 때 “(내가 받은) 임금님의 곤룡포를 함께 묻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남한산성 내 지수당(선비들 낚시터) 화단엔 그의 묘비 두 개가 서 있다. 오른쪽 묘비는 위쪽이 깨어져 없어졌고 왼쪽 묘비만 온전하다. 묘비 앞면엔 ‘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徐公之墓(가의대부동지중추부사서공지묘)’, 뒷면엔 ‘康熙六年丁未三月十三日立(강희육년정미삼월십삼일립)’이라고 새겨져 있다. 강희 6년이면 1667년이다.
▼ 굴욕의 삼전도비, 글자 잘 지워지는 대리석으로 한 뜻은? ▼

청태종의 인덕을 칭송하는 내용의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
청태종의 인덕을 칭송하는 내용의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
전쟁에서 패한 국가는 무력하다. 모든 것을 승전국의 처분에 맡길 수밖에 없다. 삼전도비(三田渡碑)가 그 좋은 예다. 1639년 청나라는 조선에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말이 요구지 사실상 명령이었다. 아울러 ‘곳곳 무너진 남한산성을 왜 다시 쌓았느냐’며 ‘모두 허물어버려라’고 질책했다.

조선 조정에선 우선 청나라에 ‘비에 새길 글’을 요구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너희들이 지어서 새기라’는 것. 인조는 몇몇 신하에게 문장을 짓도록 했다. 하지만 신하들은 아프다는 핑계로 자리에 눕거나, 일부러 거칠게 지어 청나라의 마음에 들지 않도록 했다. 인조는 당시 도승지이며 예문관제학이던 이경석(1595∼1671)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결국 이경석이 총대를 멨다. 하지만 이경석의 글도 몇 번이나 퇴짜를 맞았다. ‘마음에 없는 글’이 청나라의 성에 찰 리 없었다. 이경석은 “문자를 배운 것이 후회되고 부끄럽다”고 한탄했다.

이경석은 후에 그가 발탁한 송시열(1607∼1689)로부터 “삼전도 비문을 지어 아첨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소인배”라는 비난을 들었다. 이에 이경석은 묵묵부답 일체 말이 없었다. 1646년 효종 북벌계획이 드러나 청의 추궁이 있었을 때도 그는 “임금은 알지 못한다. 모두 내가 한일”이라고 말했다. 청은 ‘대국기만죄’로 그를 극형에 처할 것을 요구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는 왕의 간청으로 ‘백마산성 위리안치’로 목숨은 건졌다.

글씨를 누가 쓰느냐 하는 것도 문제였다. 당시 최고의 명필이었던 한석봉의 제자 오준(1587∼1666)이 맡았다. 오준은 아산 이충무공순신비문을 쓴 사람이지만 이번엔 치욕의 글씨를 쓰게 된 것이다. 그는 삼전도비문을 쓴 이후 평생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오른손을 돌로 찍으며 자책했다’ ‘벼슬을 버리고 동백숲에 숨어 거문고와 벗하며 살았다’는 전설도 그렇다. 하지만 오준은 비문글씨를 쓴 1639년 이후에도 벼슬이 형조판서와 좌참찬(1660년)까지 올랐다.

삼전도비는 현재 잠실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 호수 언덕에 있다. 높이 395cm, 너비 140cm. 한눈에 봐도 엄청 크다. 1895년 대원군이 강물 속에 처박아버린 것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찾아 다시 세웠다. 광복 후에는 주민들이 아예 땅속에 묻어 버렸다. 그랬던 것이 1963년 대홍수 때 다시 드러났다. 원래 자리는 지금 자리에서 30m 떨어진 호수 속이 맞다.

비 앞쪽은 만주글자와 몽골글자로 반반씩 써 있고, 뒷면은 전부 한문이다. 거북받침대는 화강암이고 비석은 글자가 잘 지워지는 대리석이다.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보기도 한다. 실제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한쪽엔 거북돌받침대가 하나 더 있다. 이것은 제작 당시 청나라에서 ‘너무 작다고 퇴짜를 놓은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조각은 이 퇴짜 맞은 거북돌받침이 훨씬 정교하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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