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북지역(군사분계선 남방 15km 이내에 지정된 민간인 출입통제 지역) 출입 간 준수사항’ 이행에 대한 각서에 서명을 하고 건네받은 군복과 군용 방탄모를 착용했다. 디지털무늬라는 처음 보는 위장색과 단추 대신 지퍼와 접착포로 간편해진 신형 군복은 한눈에도 예전보다 좋아진 걸 느낄 수 있었다. 팔에는 헌병완장을 찼다. 이제 최전방관측소(GOP)로 들어갈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군용차는 지뢰지대임을 알리는 팻말이 걸린 철조망이 양옆을 막아선 길을 한참 달려 검문소를 몇 번 더 통과한 뒤 GOP의 735고지(철원)를 담당하는 대대본부에 도착했다. 휴전선과 비무장지대, 그리고 북측 땅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언제 서 보아도 깊은 감회에 젖을 수밖에 없는 곳. 전쟁의 아픈 상처가 고스란히 머물러 있는 현장이다.
○ 중공군 12개 사단에 맞선 격전지
이번에 찾은 735고지는 옛 소련 유엔 대표의 휴전회담 제기(1951년 6월) 이후 약 3개월간 국군과 중공군이 격렬하게 전투를 치렀던 격전지다. 국군은 중공군에 맞서 절반도 안되는 병력으로 싸웠다. 총탄이 떨어져 백병전까지 벌였고, 언덕의 주인은 네 번이나 바뀌었다. 결국 국군은 130여 명이 전사하고 400여 명이 다쳤으며, 중공군은 10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다.
당시 상황은 세계 전쟁사에도 유례가 없는, 휴전회담과 전쟁이 동시에 벌어지는 묘한 형국이었다.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에 쌍방이 점령한 지역을 기준으로 국경이 정해진다는 이유 때문에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얻기 위해 치열한 국지전을 38선 곳곳에서 벌였다. 이를 두고 ‘제한전쟁’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이런 상황은 6·25전쟁이 시작되고 1년간 전면전을 치른 뒤 38선 부근에 전선이 형성되면서 일어났다. 그리고 휴전 제의가 있은 후부터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2년여 동안 계속됐다.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전쟁은 냉혹한 스승’이라고 했다. 6·25전쟁 동안 한반도는 초토화되다시피 했고, 민간인을 합해 25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숨지는 큰 상처를 남겼다. 너무나 냉혹했던 이 전쟁이라는 스승에게서 큰 희생을 치르며 얻은 교훈이 오늘날 많이 희미해진 건 아닐까 생각해 봤다.
당시 전사자 중에는 시신이 확인되지 않은 실종자도 많았다. 이에 2000년 육군본부에서는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전사자 유해발굴을 시작했다. 2007년부터는 정부 주도하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영구적 사업으로 추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까지 약 6600구의 유해를 찾았고 그중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반세기가 훨씬 지나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라도 제자리를 찾아간 고인들의 넋을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찾아가본 유해 발굴 현장은 엄숙하고 진지했다. 유골이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그날의 처참했을 광경을 생각했다. 그리고 끝을 기약할 수 없었던 힘든 전쟁의 한순간을 넘기지 못한 어느 군인을 떠올려봤다. 필자를 포함한 일행은 그의 영면을 다함께 묵념으로 기원했다. 총성이 멈춘 지 오래인 735고지에는 오후의 정적이 흘렀다.
○ 철책선이 주는 먹먹함
휴전선을 향해 걸었다. 소초를 향한 보급로는 누구도 지날 일 없을 듯한 고즈넉한 산길이었다. 이름 모를 나비들이 숲을 가로질렀다. 익지 않은 복숭아와 오디, 다래 열매도 보였다. 북한군을 턱밑에 마주한 이곳은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로워 보였다. 서울 거리보다 오히려 더욱 평화로운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그 기분은 철책선에 이르자 이내 먹먹해짐으로 바뀌었다. 국토를 동서로 가로지른 약 155마일(약 250km)의 철조망은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한쪽 옆에 멍하니 앉아 북녘을 바라보았다. 이 발밑 어딘가에 묻혀 있을지 모를 전사자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다시 일어나 근처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길게 뻗은 휴전선 철책을 바라볼 수 있는 곳까지 멀리 바라보았다.
훗날 우리 아이들은 서약서를 쓸 필요도, 군복을 입을 필요도, 또 어떠한 검문을 받을 필요도 없이 지뢰 없는 숲을 자유롭게 가로질러 이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두 손과 입가에 가득 물든 오디의 보라빛을 보며 서로 웃음 짓고 설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도움말=15사단 공보참모 김진태 중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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