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출판계 얘기 하나.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자 출판계도 깊은 수렁에 빠졌다. 종이 값 등 제작비는 오르는데 판매는 싸늘했기 때문. 활로를 찾기 위해 작가정신은 1998년 ‘소설향(香)’이라는 중편 시리즈를 선보였다. 100쪽 남짓한 얇은 분량, 신속한 편집·제작, 5000원의 저렴한 가격. 저자에게는 발표 지면을 주고 독자에게는 부담을 줄여 준 히트작이었다. 이윤기 김채원 이순원 윤대녕 배수아 조경란 등 작가들의 면면도 화려했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23권인 이승우의 ‘욕조가 놓인 방’(2006년)을 마지막으로 점차 잊혀졌다.
‘소설향’을 선보였던 작가정신이 새 경장편 시리즈 ‘소설락(樂)’을 내놓았다. 주원규의 ‘광신자들’과 김도연의 ‘아흔아홉’으로 출발을 알렸다. ‘독자에게는 소설 읽는 즐거움을, 문단에는 신선한 재미를 준다’는 캐치프레이즈. 소설책이 점차 얇아지는 추세에 로맨스, 추리 등 ‘락’에 충실한 작품들이 인기를 얻는 시장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이 때문에 15년 전 문단의 틈새를 찾았던 ‘소설향’에 비해 기획의 신선함은 덜하다.
주원규의 ‘광신자들’은 웃음에 충실하다. 올 초 장편 ‘반인간선언’에서 공동체와 선(善)의 타락을 묵직하게 고발했던 작가는 이번에는 작심하고 웃기기로 결심한 듯하다. ‘기’, ‘농’, ‘도’란 이름을 가진 고교 중퇴생 3명이 주인공. 지지리도 못생기고 뚱뚱해 여자로서의 성적 매력을 전혀 찾아보기 힘든 ‘농’은 사제 총이나 폭탄을 만드는 숨은 기술자다. 그는 사이비 종교단체의 지시에 따라 고성능 폭탄을 만들어 국회를 폭파시키려 한다. 농은 “300만 원을 주겠다”며 ‘기’를 꾀어 폭탄 운반을 맡기지만 기의 실수로 폭탄은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폭발한다. 이 엉뚱한 10대들은 단숨에 1급 테러리스트로 언론에 소개된다.
작가는 세 명의 시점을 따라가며 폭파 당일 하루의 모습을 로드무비처럼 급박하게 전한다. 상황은 심각하지만 곳곳에서 웃음 폭탄이 터진다. 극심한 사타구니 가려움증이 있는 농이 지하철 변태 노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든가, 단순무식한 ‘기’가 ‘명품백’을 브랜드 이름으로 오인해 벌어지는 등의 해프닝들이다. 술술 읽히는 데다 확실히 웃긴다.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사건의 진행 과정이 우연이나 충동적 행동의 연속에 지나지 않기 때문. 작가는 ‘순간 찾아드는 무모함, 사리분별에 대한 근본적 망각은 그들에겐 필연적인 미덕이자 절대 어리광으로 치환되기도 한다’는 말로 설명하려 하지만 공감하기 쉽지는 않다.
김도연의 ‘아흔아홉’은 강원도 대관령 골짜기에 사는 대학 강사 ‘나’와 아내, 그리고 숨겨둔 애인인 Y의 얘기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메모 한 장 남기지 않고 사라진 뒤 나는 아내와 Y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방황한다.
‘아내는 정물화를 닮았다. Y는 자꾸만 그림 밖으로 달아나는 습성이 있다. 나는 두 여자 사이에 있는 고개를 넘는다. 안개와 바람, 그리고 폭설과 폭우가 고개의 주인이다.’ 작품 초반에 독백처럼 등장 하는 짧은 문구가 작품을 요약한다. ‘나’는 대관령을 넘어 Y를 만나러 가거나 대관령을 다시 넘어와 아내 품에 안긴다. 그는 ‘한자리에 서서 자라는 나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여전히 몽유병자처럼 두 여자를 오간다. 고통이요, 고독한 삶이다. 이런 ‘나’의 방황은 대관령의 안개와 눈, 바람과 어울리며 한층 몽환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짙은 연무 속 촉촉한 시선을 유지하던 작품은 말미에 안개가 걷힌 듯 투명하고 밝게 변한다. 아내가 제안한 소풍에 Y가 응하며, 나와 함께 3명이 대관령을 오른다. 아내와 Y는 갑자기 언니 동생 사이가 되고, 아내는 “남편과의 잠자리가 어땠냐”고 농담까지 한다. 상대의 존재를 완전히 이해, 용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왜, 어떻게 화해하게 됐느냐에 대해서는 별반 설명이 없다. 결말이 생뚱맞게 느껴지는 이유다.
경장편은 보통 단편 속 기교의 맛, 그리고 장편 속 서사의 묵직함을 함께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이번 경장편들은 새로운 시도, 기교에는 충실하지만 촘촘하게 짜여야 하는 서사적 매력은 헐겁다. 소설락 시리즈는 앞으로 격월로 새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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