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망극한 일을 어찌 만 리 밖 책상 앞에서 쓰는 간단한 글월로 말하겠습니까…. 날이 오래니 옥도가 빛나시고 매우 태평하시고 상감의 제절과 자전 문안 태평하시고 동궁마마 내외가 안순하시기를 축수하고 축수합니다…. 다시 뵙지도 못하고 (내가 살아 있을) 세상이 오래지 아니하겠으니, 지필을 대하여 한심합니다. 내내 태평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나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청나라의 볼모로 중국 톈진(天津)에서 유폐되어 지내던 1882년 10월 12일 쓴 한글편지 일부를 풀어 쓴 것이다. 편지봉투에 ‘뎐 마누라 젼(前)’이라고 쓰여 있어 흥선대원군이 부인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종덕 한국학중앙연구원 어문생활사연구소 전임연구원은 최근 이 연구소가 주최한 ‘조선시대 한글편지 공개 강독회’에서 이 편지의 수신인은 며느리 명성황후라고 주장했다. 편지봉투의 ‘뎐’은 대궐 전(殿) 자, ‘마누라’는 지체 높은 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는 것. 이 연구원은 순조의 딸 덕온 공주의 손녀인 윤백영 여사의 글에서도 ‘뎐 마누라’라는 표현이 중전을 가리킨 것임을 근거로 들었다.
이 연구원은 “편지 수신자를 부인으로 볼 경우 내용이 이해되지 않지만 명성황후로 해석하면 역사적 사실과 맞아떨어진다”고 설명했다. 편지에 “마마께서는 하늘이 도우셔서 환위를 하셨거니와 나야 어찌 생환하기를 바라오리까”라는 대목이 있는데, ‘환위(還位)’는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뜻으로, 명성황후가 1882년 임오군란 때 지방으로 피신했다가 환궁한 사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정치적 갈등 관계였지만 편지엔 명성황후의 안부를 크게 걱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에 대해 이 연구원은 “왕비에 대한 예의상 격식일 뿐”이라며 “오히려 임금보다 며느리의 안부를 먼저 물은 것이 특이한데, 당시 고종보다 명성황후의 실권이 컸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또 “‘나야 어찌 생환하기를 바라오리까’라는 대목에선 살려달라는 간절함이 엿보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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