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물 물 물… 땅만 보며 울던 섬, 하늘 보며 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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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30일 03시 00분


목마른 외딴 섬 10가구, 신안군 기도에 빗물이용시설 설치하던 날

기도 주민들에겐 마을 중심부 우물(사람들 가운데)에서 나오는 물이 생명수였다. 그걸로 마시고, 씻고, 농사까지 지었다. 그런데 20여 년 전 바닷물이 스며들면서 더는 이 우물물을 마실 수 없게 됐다. 이후 기도에서는 ‘물과의 전쟁’이 지루하게 계속됐다. 이제 그 끝이 보이려 한다. 서울대 한무영 교수(왼쪽)와 함께 온 대학원생 2명 그리고 기도 주민들이 옛 우물가에 섰다. 기도=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기도 주민들에겐 마을 중심부 우물(사람들 가운데)에서 나오는 물이 생명수였다. 그걸로 마시고, 씻고, 농사까지 지었다. 그런데 20여 년 전 바닷물이 스며들면서 더는 이 우물물을 마실 수 없게 됐다. 이후 기도에서는 ‘물과의 전쟁’이 지루하게 계속됐다. 이제 그 끝이 보이려 한다. 서울대 한무영 교수(왼쪽)와 함께 온 대학원생 2명 그리고 기도 주민들이 옛 우물가에 섰다. 기도=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1 섬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은 호젓한 한옥. 집 앞에서 손을 씻던 할아버지의 인상이 구겨진다. 이마의 주름은 더 깊게 파인다. 할아버지는 손을 씻자마자 방에서 핸드크림을 가지고 나온다. 그걸 손에 정성껏 바른다. 바로 바르지 않으면 손등이 트고 부어 따끔거린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핸드크림은 할아버지의 필수품이 됐다. 할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 뭍으로 나간다. 나가면 꼭 들르는 곳이 있다. 공중목욕탕이다. 거기서 목욕을 하면 피부가 입을 벌리고 숨을 쉬는 것 같아 행복하단다. 그리고 돌아올 땐 습관처럼 사오는 게 있다. 1.5L들이 생수 한 병이다.

이 마을에서 가장 어른인 김성수 할아버지(80). 눈물이 글썽거린다.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하소연을 한다. “수도에서 나오는 시원한 물 한번 걱정 없이 마시는 게 죽기 전 유일한 소원이제.”

#2 할아버지 집에서 500m쯤 떨어진 작은 교회. 예배당이 사람들로 북적인다. 20대 대학생들도 보이고, 건장한 인부들도 여럿이다. 교회 앞엔 각종 건축 자재가 쌓여 있다. 작은 섬마을에 굴착기의 땅 파는 소리가 시끄럽다. 마을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외지인이 섬 곳곳을 누빈다. 이곳을 지나는 마을 주민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흐뭇한 표정이다. “고생이 많다”며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넨다. 손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주스 한 잔을 건네기도 한다. 60대 남성이 웃으며 귀띔한다. “나가 이 섬에서 태어나 쭉 자랐는디 이라고 시끌벅적한 적은 처음이여.”

누군가의 기침 소리도 다 들릴 것 같은 이 섬마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아름답지만, 그 섬엔 숨겨진 아픔이

“수심이 너무 얕고, 갯벌도 넓어 더는 못 들어갑니다.” 25일 오전, 기자를 태운 목포 해양경찰서 소속 90t급 경비정 P-92가 섬에서 1km쯤 떨어진 바다에 멈춰 섰다. 목포를 출발한 지 1시간쯤 됐다. 경비정의 강선우 정장이 말을 이었다. “이렇게 작은 섬에 사는 주민들 챙기는 게 제일 힘들어요. 들어가기도, 나가기도 힘든 곳이라. 그래도 그들에겐 여기가 평생 지켜온 삶의 터전이잖아요. 존중하고 보살펴 줘야죠.” 잠시 뒤 섬마을에서 보낸 작은 어선이 마중을 나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전남 신안군 신의면 작은 섬, 기도(箕島). 서해안 남쪽 끝, 목포 앞바다에 위치한 신안군은 1000개가 넘는 섬으로만 이뤄져 있다. 그래서 전남 사람들은 신안군을 ‘바다 위에 떠있는 고장’이라고 부른다. 섬이 1004개라고 해 ‘천사(1004)의 섬나라’라고도 한다. 기도는 섬의 모습이 곡식을 까부르는 키를 닮았다 하여 ‘키 기(箕)’자를 붙여 이름 지었다. 신안군의 섬 중에서도 매우 작은 편이다. 지도에서조차 확인하기 힘들 만큼 작아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족히 둘러볼 수 있다.

기도 주민들이 마시는 지하수를 끓이면 부유물질이 뜬다. 그래서 마시고 난 커피잔에는 하얀 찌꺼기가 남는다.
기도 주민들이 마시는 지하수를 끓이면 부유물질이 뜬다. 그래서 마시고 난 커피잔에는 하얀 찌꺼기가 남는다.
지금 이 섬에는 단 열 가구에 22명만 산다. 이 가운데 한 가구는 교회라 실제론 아홉 가구. 주민은 60대 할아버지가 ‘젊은이’ 소리를 들을 만큼 고령화된 지 오래다. 아홉 가구 가운데 네 가구는 밭농사가 주업이고 나머지 다섯 가구는 양식업 등 바다 일을 주로 하면서 밭농사도 한다. 김은 이곳에서 알아주는 특산물이다. 섬 어디를 가도 김 양식장의 지주대가 보인다.

기도는 아름답다. 특히 해질 녘이면 섬 어디서 어느 곳을 바라봐도 한 폭의 수채화처럼 풍광이 다가온다. 마을 주민들의 삶 역시 한없이 행복하고 넉넉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섬엔 남모르는 아픔이 있다. 섬마을 사람들이 이 땅에 처음 살 때부터 숙명처럼 받아들여온 고통. 바로 물이다.

파도 파도 짠물만 ‘물과의 전쟁’

파란색 물감을 잔뜩 삼킨 듯한 바다. 그 위에 둥실 떠 있는 해는 유독 시뻘겋다. 그 해는 이 섬만 비추는 듯했다. 망망대해에 둘러싸인 기도에 내리쬐는 햇볕은 그래서 더 뜨겁고 강렬해 보였다.

기도에 발을 디디니 양파 밭이 처음 눈에 들어왔다. 햇볕을 머금은 양파는 때마침 수확기라 여기저기 포대에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양파가 작아도 너무 작았다.

“이게 원래는 배보다 더 큰데, 올해는 마늘보다 작은 것도 수두룩혀.” 양파를 포대에 담는 섬마을 노파의 목소리엔 한숨이 배여 있었다. 깊게 파인 주름을 머금은 눈가엔 슬픈 그늘이 졌다. “물이 없어서 논 작물 재배는 생각지도 못하제.” 다른 주민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작물을 쭉 훑어봤다. 그런데 그나마 키우는 밭작물도 형편없었다. 고추는 말라 비틀어졌고, 다 자란 수박은 어른 주먹만큼 작았다. 참외는 아예 열리지도 못했다.

모두 물이 부족해서였다. 가뜩이나 물이 부족한 곳인데 올해 100년 만에 최악이라는 가뭄까지 겹치면서 농업용수가 말랐다. 그게 그대로 마을 주민들의 한숨이 됐다.

사실 기도가 물 부족에 시달린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기도 주민들의 삶은 물을 구하기 위한 한 편의 장편 영화나 다름없다.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먼…. 기도 중심부에는 지름이 1m 정도 되는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이 언제부터 사용됐는지 기억하는 이는 없다. 단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얘기만 들린다.

내리쬐는 햇볕보다 공사 현장의 열기가 더 뜨거웠다. 기도 주민들의 숙원을 풀어주려면 쉴 틈이 없었다. 아래쪽 원통형 장치가 빗물에서 불순물을 걸러내는 침전조. 위쪽에도 주민들이 기존에 사용했던 물탱크가 보인다. 왼쪽 위 상자 안은 저장조 안에 달린 여과망. 빗물을 저장하기 전 다시 한 번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 기도=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내리쬐는 햇볕보다 공사 현장의 열기가 더 뜨거웠다. 기도 주민들의 숙원을 풀어주려면 쉴 틈이 없었다. 아래쪽 원통형 장치가 빗물에서 불순물을 걸러내는 침전조. 위쪽에도 주민들이 기존에 사용했던 물탱크가 보인다. 왼쪽 위 상자 안은 저장조 안에 달린 여과망. 빗물을 저장하기 전 다시 한 번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 기도=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 꿈에서도 벌컥벌컥 물마셔… “郡서 많이 돕지만, 복지가 뭐여~”

그래도 그때는 물이 좋았다고 마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그런데 김 양식을 하기 위해 외지인이 많이 드나들면서 물이 부족해졌고, 이를 틈타 바닷물이 지하로 침투해 우물물과 섞이면서 마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가 1990년대 초반이었다. 당연히 주민들은 우물을 살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밑이 암반이라 우물을 더 깊게 파지도 못했다. 주민들은 억장이 무너졌다.

주민들이 발만 동동 구르자 1993년 신안군에서 지하수를 찾기 위해 땅 세 곳을 팠다. 마을 어른들의 기억에 따르면 한 곳에선 아예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두 곳에서 40m쯤 땅을 파니 흙탕물이 나왔고, 그중 한 곳에서 쓸 만한 물이 나왔다. 다행이다 싶었다. 양이 많진 않았어도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아껴 먹으면 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안도감도 잠시. 1년이나 지났을까. 지하수에서 다시 짠맛이 나기 시작했다. 고여 있던 물이 바닥나자 주변 바닷물이 침투해 들어온 탓이었다.

물과의 전쟁은 이후로도 지루하게 계속됐다. 다행히 2008년 신안군에서 다시 75m 정도 파내려가 새로운 지하수를 얻었다. 하루 50t 정도 물이 나와 주민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크게 부족하진 않았다. 지금 주민들이 사용하는 물도 그 지하수다.

그런데 이 물은 먹을 만한 걸까. 주민 박옥남 씨(56)가 떠주는 물을 조금 맛봤다. 인상이 찌푸려졌다. 소금을 녹인 듯 짰다. 박 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나마 그냥 묵으면 낫지. 얼렸다 먹어 불면 완전 소태여.”

박 씨의 아들 상준 군(13)은 1972년 개교해 올해 2월 문을 닫은 신의초등학교 기도분교의 마지막 졸업생. 목포에서 자취하며 중학교를 다니는 상준 군 역시 섬에 살 때 물 때문에 힘들어했단다. 목욕을 해도 개운하지 않고 머리를 감으면 뻑뻑한 느낌만 든다고 짜증을 많이 냈다. 다른 주민 강행우 씨(53)의 집. 목포에서 대학을 다니는 딸 지윤 씨(19)가 방학을 맞아 마침 이날 집에 와 있었다. 지윤 씨는 “이곳에 살 땐 몰랐는데 밖에 있다 보니 여기 물을 예전에 어떻게 먹었나 싶다”며 투덜거렸다. “비누를 써도 잘 안 씻겨요. 커피 마시려고 물을 끓이면 하얀 이물질이 둥둥 떠 불쾌하고요.”

반년 만에 본 딸이 걱정이라도 됐을까. 강 씨는 생수를 꺼내 딸에게 건넸다. 기도에서 멀지 않은 섬 신의도에 있는 신의면사무소에서 얼마 전 기도 주민들에게 나눠 준 것이었다. 사실 신안군은 최근에도 기도에 지하수 개발을 시도했다. 예비비 4700만 원을 들여 개발업체와 계약을 체결하고 지난해 여름 개발에 들어갔지만 실패했다. 암반이 첫째 문제였고, 아무리 파고 들어가도 물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신안군은 지난해 여름부터 주민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생수를 공급하기로 했다. 사실상 식수 개발을 포기한 셈이다. 하지만 생수는 그저 마시는 데만 쓰일 뿐이다. 물로 인해 겪는 마을 주민들의 어려움을 잠시 막아주는 데 불과하다.

주민 대표인 김영배 씨(70). 그는 섬에 유독 애착이 많다. 기도에 정착해 사는 게 운명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섬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 했다. 항상 물 때문이었다. “가끔 시원한 물을 표주박에 떠서 벌컥벌컥 마시는 꿈을 꾸제. 어찌나 행복하던지. 근데 깨고 나면 몸 씻기에도 더러운 물을 입으로 마시잖여. 정말 섬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이 든당게.”

드디어… 서울대 연구팀서 ‘천사의 실험’

기도에는 물을 끌어 쓸 만한 강이나 호수가 없다. 해수담수화 시설을 설치하려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든다. 유지관리비 역시 만만치 않다. 바다에 파이프라인을 깔려면 그보다 비용이 더 든다. 지하수 개발도 어렵다.

물 때문에 막막한 섬마을. 주민들이 갈라진 땅만 보며 한숨 쉴 때 서울에서 손님들이 찾아왔다. 서울대 한무영 교수(56·건설환경공학)가 이끄는 빗물연구센터팀이다.

한 교수가 온 이유는 딱 하나. 기도에 집집마다 빗물이용시설을 설치해 주려는 게 그 목적이다.

빗 물이용시설의 원리는 간단하다. 일단 지붕에 홈통을 설치해 빗물을 받는다. 받은 빗물은 침전조(불순물을 침전시켜 걸러내는 장치)를 거쳐 저장조로 이동시킨다. 저장조 안엔 여과망이 있어 미세한 물질까지 걸러낸다. 식수로 사용되는 물이 이동하는 배관에는 자외선 살균기를 설치해 혹시 모를 세균 증식까지 억제한다. 주민들은 빗물을 4000L까지 모아둘 수 있는 저장조에서 각종 용수를 공급받을 수 있다.

시설 공사를 돕기 위해 현장에 온 동아기술공사의 임형복 상무는 “평균 강수량을 고려하면 1년에 저장조를 10번 이상 돌려 40t 넘는 물을 사용할 수 있다”면서 “이 정도면 각종 용수를 모두 넉넉하게 쓰고도 남을 만한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가구마다 빗물이용시설을 설치해도 비용은 해수담수화 시설의 10분의 1 수준.

그런데 이 물, 안심하고 먹을 수 있을까. 주민 김현희 씨(63·여)는 빗물연구센터의 대학원생들이 집 앞에 시설을 설치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농사짓는 데는 쓰것지만 먹기엔 좀 그라제”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실제 주민 가운데 절반 이상은 빗물을 식수로까진 고려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수(水)처리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자인 한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물이 바로 빗물”이라고 확신했다.

한 교수는 일단 받은 빗물이 산성이라는 주장부터 부인했다. 그는 “빗물은 내릴 땐 약산성을 띠지만 실제 땅에 내리면 중성화돼 안전하다”면서 “열 살짜리 꼬마도 리트머스 종이로 1분이면 확인 가능한 진실인데 많은 사람이 왜곡된 사실을 믿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빗물이 깨끗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당연히 땅이나 지하를 거치며 불순물질이 첨가된 물보다 바로 받은 빗물이 더 깨끗하지 않을까요.”

공사는 대한토목학회, 예건, 대림산업, H2L 등의 후원을 받아 23일부터 진행됐다. 공사 중간에 현장을 찾은 박우량 신안군수는 “미래의 안정적인 수자원 확보는 신안군의 숙원”이라며 “이번 시설의 효율성만 입증되면 다른 섬에도 적극적으로 전파할 예정”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공사가 마무리된 29일 오전. 하늘에선 거짓말처럼 비가 내렸다. 한 교수는 “하염없이 땅만 쳐다보던 주민들이 이젠 하늘을 보며 살 수 있게 됐다”며 활짝 웃었다. 내리는 비를 지켜보던 김성수 할아버지는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정말 물이 없을 땐 눈물이라도 모아 두고 싶었는디….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 그의 눈엔 또 눈물이 고였다.

물론 아직 속단하긴 이르다. 이번에 설치된 빗물저장시설의 효율성을 완전히 검증하려면 한 달 이상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주민들은 희망을 품을 수 있단 사실 하나만으로 행복하다. 하늘은 기도 주민의 간절한 기도(祈禱)를 이번엔 들어주실까.

기도=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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