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신안군 기도의 빗물탱크 설치 프로젝트는 한국 도서지역 ‘해갈 프로젝트’의 시범사례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기도처럼 늘 갈증에 시달리는 섬은 아주 많다. 땅에서 물을 퍼 올리다 지쳐버린 섬마을 주민들에게 하늘에서 내린 물이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서울대 빗물연구센터의 목표는 좀 더 크다. 빗물을 이용해 맑은 물을 공급하는 시스템을 세계에 전파하려 한다. 세계의 빈민촌을 ‘목마름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방법이 바로 빗물이라는 것이다. 연구센터는 올 1월 태평양 남서부 솔로몬 제도에 빗물탱크를 설치함으로써 ‘빗물 한류’를 위한 사전 준비작업을 끝냈다.
이를 진두지휘한 한무영 서울대 교수는 “빗물도 공짜, 빗물이 탱크까지 내려오도록 하는 중력도 공짜, 빗물을 정화시키는 미생물이나 태양광도 모두 공짜”라며 “간단한 시설만으로도 물 문제로 힘겨운 섬마을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빗물 정수가 이렇게 간단해?
빗물을 받아 식수로 사용하기까지는 여러 기술이 활용된다. 그러나 복잡하진 않다. 상하수도나 해수담수화 시설에 비해 비용도 매우 저렴하다. 땅속이나 강에서 물을 끌어오지 않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이용하니 에너지를 쓸 일도 없고, 환경에 미치는 영향도 적다.
한 교수는 올해 3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열린 제6차 세계 물 포럼에서 저비용 빗물시설에 대해 발표해 많은 호응을 이끌어냈다. 발표 주제는 최소의 에너지를 쓰면서도 빗물을 깨끗하게 정제하는 먼지 제거 장치(Particle Remover)와 태양광 살균(Solar Disinfection)이었다.
빗물은 가정의 수돗물보다 깨끗하지만 공기 중의 먼지가 함께 씻겨 내려올 거라는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간단한 물리적 장치만으로도 먼지를 쉽게 걸러낼 수 있다. 먼저 빗물을 저장탱크에 모을 때 U자형 관을 사용해 최대한 살살 흘려보낸다. 빗물에 섞인 먼지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모두 밑으로 가라앉기 마련인데,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다. 두 번째는 탱크에서 물을 빼서 쓸 때 부유물이 떠 있는 표면층 물이 나오지 않도록 호스의 수위를 수면 아래로 조절하는 것이다. 또 마이크로박테리아를 넣어 물속 유기물을 분해하는 자정 작용을 유도한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면 마실 만큼만 태양광으로 살균한다. 복잡한 장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일단 페트병에 물을 담는다. 보온을 위해 과자봉지나 비닐로 래핑(W-SODIS)하거나, 아랫면과 옆면을 알루미늄 코일로 싸서 자외선을 집중(SOCO-DIS)시켜 살균한다. 이 둘을 함께 사용(W-SOCO-DIS)하거나, 밖은 알루미늄 코일로 싸고 안에는 레몬즙이나 식초를 넣어 살균 효과를 높이는 방법(I-SOCO-DIS)도 효율적이다. 이런 장치가 힘들 경우에는 기존의 자외선 살균기를 활용해도 무방하다.
한 교수가 강조하는 빗물 활용 기술의 핵심은 세 가지다. 수질이 좋아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고, 에너지를 덜 쓰는 값싼 방법으로 물을 공급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문화적으로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올해 초 솔로몬 제도에서의 빗물탱크 프로젝트에서 그는 이를 모두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다
프로젝트팀은 우선 솔로몬 제도 전역에서 대여섯 곳의 후보지를 둘러본 뒤 현지 정부 관계자 등과 협의해 빗물탱크를 설치할 2곳을 선정했다. 그중 하나가 수도인 호니아라 외곽의 ‘파트모스 공동체(Patmos community)’다. 화산섬 말레이타에 살던 원주민들이 자리를 잡은 이 빈민촌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델타 지형에 있다. 50가구 주민 250여 명은 대부분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한다.
이곳에는 물, 전기, 그리고 도심과 연결해 주는 도로가 없었다. 폐자재로 지은 집에서 살거나 헐벗고 살아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전기가 없어 비싼 등유로 불을 밝혀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선택사항이었다. 그렇지만 식수는 달랐다. 강물은 빨래나 목욕까진 가능해도 마시기엔 부적합했다. 오염된 마을 우물은 방치된 지 오래였다. 기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고기를 잡아 하루 10솔로몬달러(1솔로몬달러=174원)를 벌면 물값으로만 매일 2달러를 써야 했다. 물이 없는 곳이라고 했지만 사실 물은 넘쳐났다. 연간 강우량이 3000mm에 이르니 말이다. 다만 그 물을 활용할 방법을 몰랐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1월 9일에야 설치 장소를 확정한 프로젝트팀은 15일 귀국할 예정이었다. 남은 시간은 겨우 5일. 시내의 또 다른 설치 장소인 퍼치스쿨에 이틀을, 카누를 타고 강을 건너야 하는 파트모스에는 사흘을 쓰기로 했다. 전기가 없으니 해가 지는 오후 7시경까지는 작업을 끝내야 했다. 이래저래 마음이 바빴다.
한 교수는 “당시에 가져간 것은 자재비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설계도조차도 현지 상황을 확인한 뒤에야 그렸다. 다행히 벤치마킹 대상이 있었다. 몇몇 잘사는 집에선 뉴질랜드 회사의 빗물탱크를 사용하고 있었다. 프로젝트팀은 그 시설보다 조금 더 좋고 훨씬 싸게 만드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다. 벤치마킹이 중요했던 이유는 또 있다.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자재를 정확히 알려주는 바로미터가 됐기 때문. 한 교수가 즉석에서 그린 설계도에 따라 물탱크와 벽돌, 종이, 못, 풀, 가위, 시멘트, 삽 등 필요한 자재와 공구를 구입했다.
파트모스 주민들도 팔을 걷어붙였다. 먹을 물을 준다는데 사흘쯤 고기 못 잡는 건 문제가 아니라며 청년 10여 명이 나섰다. 프로젝트팀은 대환영이었다. 임금이 들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직접 만들어 봐야 유지·보수를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기술 이전이 이뤄지는 셈이다. 한 교수는 “이런 시범 케이스를 확산시키려면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과 비용 지불 가능성(affordability)이 중요한데 주민이 스스로 만들면 이 둘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흘 만에 3.75t급 빗물탱크가 거짓말처럼 완성됐다. 마을 사람들은 빗물탱크에 스프레이로 물고기, 꽃, 배 등과 같은 그림을 그려놓고는 물을 ‘만들어 준’ 이방인들과 신나는 축제를 벌였다. 파트모스에 빗물탱크가 설치된 ‘사건’은 현지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흥겨워진 파트모스 청년들은 이틀 만에 퍼치스쿨에 3t급 빗물탱크를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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