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되면 골목에서 흔히 마주하는 장면이 있다. 저녁 때 슈퍼나 구멍가게 앞 파라솔에서 사람들이 가벼운 안주에 맥주나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이다. 그들은 여지없이 플라스틱 의자나 스툴에 앉아 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한 개에 몇천 원이면 구입할 수 있는 싸구려 의자다.
그래도 그 싸구려 플라스틱 의자에 의지해 사람들은 일에서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잠시 푼다. 학생들은 교실이나 도서관에서 금속 프레임에 합판으로 된 좌판과 등판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지치도록 앉아 있다. 카페에 가면 흔히 ‘파리의 카페 의자’라는 것부터 북유럽 스타일의 따뜻한 의자, 알록달록한 예쁜 의자, 몸을 깊숙이 누일 수 있는 라운지 의자 등 다양하고 아름다운 의자들을 만날 수 있다. 》 회사에 가면 전문가들이 ‘오발’이라고 부르는 다섯 개의 다리를 가진 똑 같은 회전의자에 수십 명이 똑 같은 자세로 모니터를 주시하는 풍경을 볼 수 있다. 그들은 퇴근하고 집에 가면 대개는 소파에 길게 누워 TV를 볼 것이다.
의자만큼 우리 삶 속에 밀착한 물건을 찾기도 쉽지 않다. 다양한 구실만큼이나 다양한 디자인의 의자들은 그 재료와 형태의 아버지 격이 있기 마련이다. 20세기 전반기까지 의자는 고전주의 스타일이 지배했다.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등으로 양식이 나뉘지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눈에 그것들은 비슷비슷하다. 왜냐하면 나무 프레임에 천 재료의 좌판과 등판으로 만들어진 점에서는 다 똑같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다리 4개에 좌판, 팔걸이, 등받이로 이루어진 구성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다 20세기 초 모더니즘이 등장하면서 의자는 다양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그 다양화의 길을 튼 원조 의자들이 있다.
곡목(曲木) 의자
언제부턴가 파리의 카페 의자로 알려진 토네트 의자를 우리나라 카페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게 됐다. 토네트 의자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의자일 뿐 아니라 최초로 나무를 구부리는 기술로 만든 의자로도 가구 역사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실패한 오스트리아의 사업가 미하엘 토네트는 1840년대에 증기로 나무에 열을 가하여 구부리는 기술로 특허를 얻고, 이 기술로 등받이 프레임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의자들을 디자인하고 생산했다. 과거에도 곡선 프레임의 의자들이 있었지만 일일이 나무를 깎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들고 가격도 비쌌다. 그러나 토네트 의자는 열로 부드러워진 나무를 금속 틀에 넣어서 순식간에 곡선 프레임을 만들었다. 또 이 부품들을 여러 사람이 분업으로 제작해 조립하는 방식으로 공정을 압축함으로써 가격 경쟁력도 생겼다. 의자는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 뒤 20세기 초반에 모더니즘의 선구자들이 단순하면서 곡선미가 살아 있는 뛰어난 곡목(曲木) 의자들을 만들었다. 1930년대 핀란드 건축가 알바 알토는 베니어합판을 틀에 고정시켜 구부리는 기술로 또 한번의 혁신을 이루었다. 자신이 설계한 파이미오 요양원에 놓을 용도로 디자인한 파이미오 의자는 다리를 우아하게 구부려 의자 전체를 지탱하게 했는데 형태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베니어합판이라는 재료가 주는 가벼움과 튼튼함까지 얻는 효과를 보았다. 그 뒤 부드럽게 휘어지는 프레임의 의자들은 북유럽 가구의 중요한 특징이 된다.
금속 프레임 의자
바우하우스는 모던 디자인의 산실이다. 바우하우스의 학생이었다가 교수가 된 마르셀 브로이어는 혁신적인 의자 디자이너로 모던 가구의 중요한 이정표를 만들었다. 바로 속이 빈 금속관으로 의자를 만든 것이다. 금속 프레임 의자가 나오기 전까지 의자란 크고 무거워서 옮기기도 힘들었고, 육중하게 거실을 점유하고 있어서 실내 분위기를 답답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1925년에 브로이어가 날씬한 금속 프레임 의자를 디자인한 뒤로 20세기의 가정환경은 완전히 새로운 양식으로 거듭났다. 산뜻하고 여백이 있는 공간이 창조된 것이다.
브로이어는 자전거의 금속 프레임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를 의자에 적용했다. 금속관은 가벼울 뿐만 아니라 강도가 세서 얇아도 충분히 하중을 견딜 수 있었다. 가느다란 금속 프레임에 얇은 천을 연결해 좌판과 등판을 만들자 이 의자는 더욱 경쾌해 보였다. 바실리 의자로 이름 붙인 이 최초의 금속관 의자가 나오자 당대의 건축가, 디자이너들이 너도나도 금속관으로 된 의자와 테이블을 내놓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마르트 스탐은 또 다른 혁신적인 의자를 디자인했다. 두 개의 다리만으로 하중을 견디는 이른바 캔틸레버(외팔보) 의자를 선보인 것이다. 캔틸레버는 건축에서 기둥 없이 보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는 구조를 말한다. 이는 건물의 지붕이나 테라스가 기둥 없이 공중으로 길게 뻗어 나오게 해 공중에 뜬 것처럼 보이는 시각 효과를 만들었다. 스탐은 이를 의자에 적용한 뒤 수많은 디자이너가 이 방식으로 의자를 디자인했다.
성형 합판 의자
미하엘 토네트의 토네트 의자와 알바 알토의 파이미오 의자는 곡목 의자로서 하나의 원형이 됐다. 그리고 미국의 위대한 가구 디자이너인 찰스와 레이 임스 부부는 3차원으로 나무를 휘게 하는 기술로 의자를 만들어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또 다른 곡목 의자의 원형을 창조했다.
임스 부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국방부로부터 부상당한 군인들을 위한 부목을 디자인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들은 합판으로 부목을 만드는 기술을 연구함으로써 합판 성형 기술의 달인이 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이 기술을 의자에 적용한다. 그전의 곡목 기술은 주로 프레임을 휘는 데 사용했고, 좌판과 등판을 휘게 하더라도 2차원에 그쳤다. 그러나 임스 부부의 합판 성형 기술은 삼차원으로 확대돼 좌판이 엉덩이의 모양에 맞게 입체적으로 미묘하게 구부러지도록 한 것이다. 얇은 나무를 여러 겹 붙여 흐물흐물한 상태의 합판을 틀에 고정해 프레스기로 눌러 형태를 만들었다. 이로써 나무를 깎지 않고도 쉽게 원하는 형태를 만들 수 있게 됐으며 인체 공학적으로도 편안한 의자를 디자인할 수 있었다. 물론 가격도 훨씬 저렴했다.
이 부부가 1945년에 처음으로 생산해낸 LCW(Lounge Chair Wood) 의자는 합판 성형 의자의 신호탄이다. 그 뒤 임스 부부의 합판 성형 의자들은 유럽의 디자이너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대표적인 디자이너가 덴마크의 아르네 야콥센이다. 그는 오늘날 가장 많이 모방된 의자 가운데 하나인 개미의자와 7의자를 이 합판 성형 기술로 디자인했다. 오늘날 학교, 도서관, 관공서, 공공건물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합판 성형 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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