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이들이 남긴 일상의 기록은 퍼즐처럼 그 시대의 모습을 재구성한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생애는 근현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 책은 120여 년 전 함북 산골짜기에서 태어나 북간도에서 생활한 여자아이의 성장기를 통해 생활과 교육환경, 사회상과 여성관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펼쳐 보인다. 주인공은 다섯 살 때 가족과 함께 척박한 함북 회령을 떠나 어른 주먹만 한 감자가 주렁주렁 열린다는 북간도에 정착한 ‘고만녜’. 3남 6녀 중 넷째 딸로 ‘딸은 지겹다. 이제 고만 낳으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북간도 아이들은 대여섯 살만 되면 나무하고 물을 긷고 방아를 찧었다. 길고 긴 겨울밤에 여인들은 삼으로 실을 잣고 삼베를 짜 식구들의 옷을 지었다. 여자아이들에게는 글을 가르쳐 주지 않아 고만녜는 남동생에게 한글을 배우고, 틈틈이 모은 호박씨 한 되를 팔아 책을 산다. 17세 때 얼굴도 모르는 한 살 아래 까까머리 중학생에게 시집 간 뒤 시아버지의 배려로 여학교에 다니게 되고, 친정 오빠 이름 ‘진묵’과 비슷한 ‘신묵’이라는 이름도 갖게 된다.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의 중심지였던 북간도 명동촌의 역동적인 모습도 비춰진다.
100년 전 인물사진을 콜라주해 만든 그림은 옛 정취를 더해 주면서 이 이야기가 논픽션이라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고만녜는 문익환, 동환 목사의 어머니인 김신묵 여사(1895∼1990). 저자는 문동환 목사의 딸로 2006년 조부모의 회고록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을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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