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통해 전혀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싶다면 배명훈(사진)의 책을 집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전작에서 ‘창조’한 세계들은 이렇다. 647층의 초고층 타워국가 빈스토크(연작소설 ‘타워’), 중국 첩첩산중의 오지에 설치된 몇백 m짜리 크레인(단편 ‘크레인 크레인’), ‘천공의 성 라퓨타’를 연상시키는 가상의 우주 행성 나니예(장편 ‘신의 궤도’)…. 장르적으로 공상과학(SF)소설이지만 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흥미진진한 전개에 더해 작가는 인간 탐욕의 해체, 신의 존재에 대한 현대적 해석, 첨단 과학의 폐해 등 인문학적 질문들을 던진다.
이번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전작들에 비하면 현실적이다. 유럽 중부에 있는 체코다. 하지만 고풍스러운 성, 예스러운 길이 아름답게 이어진 관광지가 아니다. 작가는 칼바람이 부는 혹독한 겨울의 체코, 더 정확하게는 짙은 어둠과 회색빛 도시를 그린다. 악마가 불쑥 튀어나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음습한 도시다.
‘나’는 11년차 킬러. 연방에 소속된 킬러지만 정확히 누구의 지시를 받고, 누구를 왜 죽여야 하는지 모른다. 그저 ‘보이지 않는 손’의 지시를 받고 체스판 위의 말처럼 임무를 수행한다. 연방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있다. 서열 3위였다가 숙청된 ‘장무권’의 잔당들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 이런 거시적인 역학 관계 속에 ‘나’는 연방을 배신하게 된다. 장무권의 딸 ‘김은경’을 구하기 위해서다. 나는 장무권 일당과 느슨한 동맹을 맺고, 특수 정보 분석가인 친구 ‘조은수’의 도움을 받아 연방에 맞선다.
얼핏 전형적인 첩보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과학과 종교를 접목하며 상상력의 점프를 시도한다. 역시 예상치를 벗어난다. 핵심은 특수 콘택트렌즈. 이 렌즈는 송수신기를 겸할 뿐 아니라 날아오는 총알을 볼 정도로 시력을 높여주고 근력을 극대화시킨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렌즈와 시신경이 착용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교감하면서 내면의 무의식이 사람을 지배하는 상황이 빚어진다. 즉 초인적인 능력은 렌즈를 통해 무의식 속에서 나온 악마, 그 불가해한 존재의 힘인 것이다.
‘악마는 그 감각기관 자체가 아니라 재해석과 관련된 곳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영혼이라고 불러도 좋고, 마음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 어딘가.’
작가의 상상력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악마의 주인이 따로 있고, 그 종속관계가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다는 것까지. 무한 상상력과 수많은 복선은 분명 땀의 노력이지만, 따라가다 보면 가벼운 피로감도 든다. 퍼즐 맞추기가 처음에는 즐겁지만 나중에는 머리가 아픈 것처럼.
앞선 ‘신의 궤도’에서 너무 거대한 스케일을 다루느라 촘촘한 짜임새가 아쉬웠던 작가는 이번에는 압축된 공간에서 치열한 심리전을 펼친다. 흡사 난해한 체스 경기를 독자에게 권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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