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체호프 ‘갈매기’가 이곳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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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3일 03시 00분


벌교 싸구려 록밴드가 됐다… ‘80년 광주’ 그 아픔을 절창한다
■ 연극 ‘뻘’ ★★★★

《 재치가 넘친다.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의 호젓한 호숫가를 무대로 한 체호프의 세련된 비극 ‘갈매기’를 1980년 광주의 아픔을 간직한 전남 벌교의 뻘밭에서 펼쳐지는 해학적 풍속극으로 엮어낸 극작 솜씨가. 자기연민과 허위의식으로 물든 채 예술의 본질을 찾아 방황하는 러시아 부르주아 계층 캐릭터들은 속에 있는 말을 담아두지 못해 육두문자 뒤섞인 질펀한 호남 사투리로 중무장한 한국적 캐릭터들로 변신한다. 》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한국적 음악극으로 풀어낸 ‘뻘’. 원작의 주인공 트레플레프를 2개의 캐릭터로 나눈 작곡가 운창(유제윤·뒤)과 기타리스트 정석(이수현)은 전남 벌교 역전 식당 아가씨 홍자(신정원)와 ‘블랙 시걸’이란 록그룹을 결성해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겠다며 기상천외한 노래를 들려준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한국적 음악극으로 풀어낸 ‘뻘’. 원작의 주인공 트레플레프를 2개의 캐릭터로 나눈 작곡가 운창(유제윤·뒤)과 기타리스트 정석(이수현)은 전남 벌교 역전 식당 아가씨 홍자(신정원)와 ‘블랙 시걸’이란 록그룹을 결성해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겠다며 기상천외한 노래를 들려준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기성 연극계를 대표하는 유명배우 어머니와 새로운 연극을 꿈꾸는 무명작가 아들의 대립은 왕년에 날렸던 트로트 여가수 송동백(추귀정)과 저항적 민중가수를 꿈꾸는 무명의 로커 운창(유제윤)의 세대 갈등으로 치환된다. 어머니의 젊은 연인은 예술적 열정을 잃고 방황하는 인기 소설가에서 군사정권의 검열 바람에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는 가요계 히트곡 메이커 갤럭시 박(윤상화)으로 둔갑한다. 그리고 배우를 꿈꾸는 아들의 구원의 여인, 니나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교태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부르는 역전식당 푼수데기 딸 홍자(신정원)가 된다.

압권은 원작에서 니나의 숭고한 목소리로 극화됐던 아들의 연극이다. “인간도 사자도 독수리도 뇌조도, 뿔 달린 사슴, 거위, 거미, 물속에 사는 말 없는 물고기, 바다의 불가사리,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까지 모든 생명이 슬픈 순환을 마치고”라는 대사로 시작하던 연극은 “칠게 길게 농게 엽낭게 눈콩게 털보긴집눈게…”로 온갖 바다생물 이름을 나열하는 엽기적 록음악으로 바뀐다.

원작의 내용을 아는 관객이라면 속웃음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 모르는 관객도 웃음이 터지긴 마찬가지다. 원작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하는 갈매기가 ‘뻘’에선 그냥 이름으로만 등장한다. 아들이 결성한 록 밴드의 이름으로. 갈매기의 내용을 아는 관객은 빙그레 웃겠지만 모르는 관객도 검은 갈매기란 뜻의 ‘블랙시걸’이란 그룹명을 명색이 리드싱어인 홍자가 ‘블랙시거’로 발음하는 모습에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다.

젊은 극작가 김은성(35)의 저력을 재확인했다. 올해 초 두산아트센터의 경계인 시리즈로 선보인 창작극 ‘목란언니’로 그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킨 그는 보통 동년배 작가들은 범접할 생각도 못하는 대가들의 희곡을 갖고 노는 데 비범한 재주를 보여 왔다. 체호프의 ‘바냐삼촌’을 1970년대 부동산 개발 붐이 불어 닥치기 전 잠실을 배경으로 윤색한 ‘순우삼촌’(2010)과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을 청년실업에 시달리는 서울 달동네 배경으로 바꿔 쓴 ‘달나라연속극’(2012)이다.

그렇다고 이들 작품을 번안극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원작의 구성과 캐릭터를 차용하면서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특유의 익살과 해학을 섞어 풍자하기 때문이다. ‘뻘’ 역시 갈매기의 내용을 해학적으로 풀어내면서도 1980년 광주에 대한 기억을 관통하는 한국사회의 집단죄의식을 일깨운다. 1년에 겨우 1mm씩 쌓인다는 갯벌의 장구한 시간개념에 빗대어.

연극은 희미해진 그 죄의식을 군부독재 시절 윤색된 상태로 인구에 회자됐던 수많은 가요로 불러일으킨다. 또한 원작 속 주변 인물들을 바람이 불면 가장 먼저 소리 내 울지만 그 바람이 지나가면 가장 먼저 일어서는 갈대와 같은 서민들로 새롭게 형상화하면서 원작과 전혀 다른 결론으로 치닫는다.

그중에서도 뻘밭에서 꼬막을 캐는 나조금(이지현)의 대사가 강렬하다. 광주가 군홧발에 짓밟히던 날 믿었던 사내(김종태)에게 겁탈당한 뒤 말을 잃은 나조금은 그 죄의식으로 반신불구가 된 사내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문을 연다. “요라고 아프다고 봐줘불문, 불쌍하다고 봐줘불문, 근다고 다 용서해불문 안되겄습디다…긍께 내 말은 앞으로도 이녁(당신)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이여라. 용서를 안 헌다는 말은 미워허겠다는 말이 아니여라. 용서를 안 허겠다는 것은 용서를 안 허겠다는 것이여라.”

: : i : : 부새롬 연출. 28일까지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111. 1만∼3만 원. 02-708-5001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연극#공연리뷰#갈매기#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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