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8월 16일. 알래스카(미국)와 이웃한 캐나다 서북부 유콘 강변의 오지 도슨시티(유콘 준주)에서 금이 발견됐다.
‘클론다이크 골드러시’의 개막이다. 이 골드러시는 대단했다. 3년간 10만 명이나 몰렸다. 하지만 노다지를 캐러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당시 탐광자들은 증기선으로 도착한 스캐그웨이 항(알래스카 주)에서 험준한 화이트패스(고개)를 넘어
화이트호스(유콘 준주)로 갔는데 거기서 다시 보트로 유콘 강의 급류를 헤치고 북쪽으로 700km를 내려갔다.
유콘에선 지금도 금이 난다. 그 유콘의 화이트호스와 154km 북방의 헤인스정크션을 찾았다.
화이트호스는 유콘 준주의 주도(州都)이고 헤인스정크션은 극지방(남극 북극)을 제외하면 빙하지대로는
지구상에서 가장 넓다는 클루아니 국립공원의 오지마을. 두 곳은 알래스카하이웨이(총연장 2700km)로 이어졌다. 이 2차로 도로는 뱃길뿐이던 알래스카 땅을 차로 갈 수 있도록 해준 최초의 도로(1942년 개통)로 캐나다(유콘 준주와
브리티시컬럼비아 주)를 관통한다.
도로를 닦은 이는 미국. 일본이 진주만 공격(1941년 12월)에 이어 알류샨 열도의 섬(2개)을
점령하자 전면전에 대비해 미 육군 공병대를 동원해 건설했다. 하지만 현재는 RV(Recreational Vehicle·숙식 가능 캠핑카)에
인기만점인 관광도로. 헤인스정크션은 알래스카하이웨이 건설 당시 공병대 주둔지였는데 알래스카 만의 항구
헤인스(알래스카 주)를 잇는 헤인스로드와 분기점이다.》 알래스카와 유콘은 바늘과 실
알래스카 주 지도는 좀 묘하다. 동경 141도와 북위 60도의 세로와 가로줄 직선이 서쪽으로 삐죽 돌출한 지형을 싹둑 자른 모양새인데 자세히 보면 그게 전부가 아니다. 60도선 조금 위부터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선이 유콘 준주 서부 해안 내륙으로 옮겨와 해안과 평행하게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캐나다)까지 그어졌다. 그러니 이 선 서쪽의 피요르와 섬, 바다는 모두 미국 영토. 그런데 그걸 들여다보노라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요 항구가 모두 미국 영토에 편입되는 바람에 내륙의 유콘 준주가 완벽하게 고립돼서다. 유일한 바닷길 통로인 린 캐널의 두 항구인 스캐그웨이와 헤인스마저도 미국이 차지한 결과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사이좋게 관광수익을 나누고 있다. 스캐그웨이로 도착한 크루즈여행자와 알래스카하이웨이로 화이트호스를 찾은 RV 여행자 등 수많은 관광객이 철도로 유콘과 알래스카를 찾고 있어서다. 그 철도는 골드러시 직후(1900년) 개통된 스캐그웨이∼화이트호스 노선의 화이트패스&유콘루트(176km). 골드러시 당시 화이트호스로 생필품 공급과 여객수송을 위해 가설한 것이다. 하지만 관광용으로 운행을 재개한 1988년 이후는 화이트호스 대신 68km 남방의 호반 마을인 카크로스까지만 운행한다.
이 철도는 천길 낭떠러지의 녹슨 철교와 계곡의 터널 등을 통과하는데 이곳은 아직도 도로를 건설하지 못할 만큼 경사가 급한 험준한 산악. 해발 0m의 스캐그웨이 항구를 떠나 해발 873m의 화이트패스(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을 이루는 고개)까지 3.9%의 급경사를 20분 만에 오른다. 110여 년 전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때 탐광자들이 등짐을 지고 오르던 바로 그 길이다. 화이트패스에서는 국경을 통과하므로 여권이 필요하다.
원색의 건물
드디어 화이트호스의 다운타운. 2만4000명밖에 살지 않는 소박한 타운이라는 말에 별반 기대도 안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4층 건물이 최고인 데다 시내는 늘 한산했다. 당시는 6월 초로 북위 60도에 해발 640m인 이곳은 이제 막 가지에서 연초록 잎이 움을 틔우던 초봄. 둘러싼 주변의 산악은 아직도 눈에 덮였고 한낮에도 기온은 13도를 넘지 않았다.
다운타운은 유콘강을 끼고 있다. 북미대륙에서 세 번째, 캐나다와 알래스카에서는 가장 긴 강이다. 골드러시가 일어난 도슨시티는 700km 하류. 골드러시 당시는 이곳에서 보트를 사거나 만들어 이동했고 1921년부터는 수차로 추진되던 증기선 클론카이트호를 이용해 강을 오르내렸다. 물론 지금은 알래스카하이웨이로 오간다. 클론다이트호는 강변 둔치에 올려져 당시 역사를 전하는 유물로 전시 중이다.
화이트호스 시내는 소박하면서도 화려하다. 소박함은 작고 평범한 건축에서 온다. 그런데 그게 화려하다함은 그 외벽을 장식한 원색의 페인트칠과 휑한 빈 벽을 가득 채운 다양한 그림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다운타운의 대부분 상점은 빨강 파랑 노랑 보라 주황 등 원색 페인트로 칠해졌다. 거기서 나는 사람이 적게 사는 데서 오는 을씨년스러움을 단박에 날려버리는 쾌거를 목도한다. 이런 데서 사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벽에 그린 다양한 그림도 그렇다. 주로 골드러시의 역사를 담고 있는데 가끔은 캉캉춤을 추는 댄서의 모습도 보인다. 그 원색에서 생기가 느껴짐은 당연하다.
골드러시 뒤에 감춰진 좌절과 절망
화이트호스는 골드러시의 붐 타운. 그 흔적은 도처에 있었다. 다운타운을 보자. 배낭 멘 허스키를 데리고 있는 탐광자 동상이 있다. 강변의 맥브라이드 박물관엔 그 역사가 고스란히 수집돼 있다. 거기엔 ‘샘 맥기’라는 탐광자의 통나무집도 있다. 나는 그의 이름을 거리조각에서도 발견했다. 그 조각은 책상 모습인데 거기엔 시 한 편이 씌어 있었다. 한겨울에 썰매로 이동 중에 숨을 거둔 샘 맥기를 위한 것으로 만약에 죽으면 화장시켜주겠다고 약속한 개 썰매꾼이 쓴 것이다. 썰매에서 샘 맥기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로 죽어가며 이렇게 부탁한다. 이런 동토에 묻히면 죽어서도 추울 거라며 화장을 요청했던 것. 약속대로 몰이꾼은 한 호숫가 오두막에서 보일러에 불을 지피고 거기에 시신을 넣었다. 그런데 나중에 문을 열어 보니 그가 앉은 채로 ‘이런 따뜻함은 처음’이라며 ‘문을 닫아 달라’했다고 전해진다. 한 탐광자의 비참한 죽음은 이곳 겨울 밤하늘의 환상적인 오로라 빛과 대비돼 더더욱 슬프게 다가오는데 골드러시 타운에는 그런 애수가 서려 있다.
헤인스정크션으로 가는 길
이른 아침 자동차로 알래스카하이웨이로 접어들었다. 154km 북쪽의 헤인스정크션을 향해서다. 도로는 왕복 2차로. 근 6개월의 긴 겨울을 이제 막 끝낸 후라 곳곳에서는 도로공사가 한창이었다. 캐나다엔 두 계절―겨울과 도로공사 철―밖에 없다는 이곳 사람들의 조크를 사실로 확인하는 순간이다. 도로 보수 공사가 봄부터 가을까지 전국적으로 쉼 없이 계속돼서다. 도로는 한산하기 그지없다. 아직 초봄이라 관광객도 많지 않아서인데 그나마 띄엄띄엄 만나는 차량 중에서도 가장 많이 보이는 건 역시 RV.
헤인스정크션으로 가는 내내 주변은 산악풍광 일색이다. 해발 2000m급의 화이트호스 산맥인데 차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왼편(서쪽) 산 너머로는 해발 5000m급 산악의 집적체인 세인트일라이어스 산맥이 있다. 북미대륙에서 두 번째, 캐나다 최고봉인 마운트 로건(5959m)도 거기 있다. 드디어 진짜 정크션(삼거리 갈림목)에 도착했다. 곧장 가면 알래스카의 페어뱅크스까지 이어지는 알래스카하이웨이, 왼편 8시 방향은 브리티시컬럼비아 주를 거쳐 알래스카 주의 항구도시 헤인스까지 이어지는 헤인스 로드(241km)다.
그런데 헤인스 로드는 클루아니 국립공원의 경계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도로 서편의 상당한 지역이 모두 공원인 셈. 남극과 북극을 빼고는 지구상에서 빙하지대로는 가장 크다는 곳이 바로 여기 헤인스정크션의 클루아니 국립공원이다. 제대로 보려면 비행기를 타야 한다. 그래서 찾은 곳이 헤인스정크션 공항에 사무실을 둔 클루아니 빙하투어 회사. 두 대의 세스나 경비행기(승객 5인승)로 40분∼3시간 반 걸리는 빙하투어를 운영하고 있다.
세계 최대 빙하지대 클루아니 국립공원
이륙한 세스나는 기수를 서쪽으로 돌려 고도 3300m로 비행했다. 그 아래로 펼쳐지는 눈 덮인 하얀 세상. 그건 온통 빙하 세상이었 다. 산도 계곡도 온통 하얀 눈에 덮인 모습인데 빙하다. 빙하라면 지난 10여 년간 스위스 알프스의 알레치 빙하부터 캐나다 로키의 컬럼비아빙원과 빅토리아 빙하, 뉴질랜드 남알프스 산맥의 태즈먼 빙하 등 지구상 곳곳에서 보아온 터. 그런 만큼 내겐 그리 새로울 게 없다. 그런데 클루아니 국립공원의 빙하지대는 그게 아니었다. 세상에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우선 그 규모다. 지상 최대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마치 지구 전체가 1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줄 만큼 광대했다. 다른 점이라면 당시는 지구(육지)의 32%가 덮인 데 반해 지금은 10%로 줄었다는 것 뿐.
비행 내내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너무도 다양한 빙하의 모습 때문인데 그래서 이 빙하가 내겐 마치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로 다가왔다. 나이아가라의 폭포수처럼 급경사로 흐르는 빙하가 있는가 하면 마치 운해처럼 넓디넓은 계곡을 반쯤 덮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또 빙하 표면에 형성된 수천수만 개의 크고 작은 못, 거기에 담겨 보석처럼 빛나는 새파란 빙하수의 풍경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수면에 이는 잔물결처럼 상부 표면이 수많은 크레바스로 무늬 진 빙하―글레이셜 서지 ‘빙하파도’라고 부름―는 클루아니 국립공원에서 본 최고의 수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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