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무더운 계절이 왔습니다. 더위를 달랠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간절해지는 때이기도 하죠. 그런데 아이스크림이나 우유를 섭취하면 괴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속이 메스껍거나 배에 가스가 차고, 심하면 설사를 하거나 토합니다. 아이스크림이나 우유에 있는 탄수화물인 락토오스(유당·乳糖)를 소화시키는 효소인 락타아제가 몸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증세는 ‘유당분해효소결핍증(lactose intolerance)’이라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우유를 매일 조금씩 마신다고 락토오스에 대한 내성(耐性)이 길러지지 않습니다. 다만 증세는 나아지게 할 수 있습니다. 락타아제가 들어 있는 알약을 먹어 외부에서 효소를 공급해 주면 됩니다.
○ 우유를 마실 수 있는 어른은 많지 않다
미국에서는 한동안 우유를 못 마시는 유당분해효소결핍증을 비정상적인 병으로 여겼습니다. 여기에 인류학자들이 문제를 제기했지요. 우유를 못 마시는 어른보다 우유를 마실 수 있는 어른이 비정상이라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유당분해효소결핍증은 병이 아닙니다. 젖먹이동물인 우리는 모두 락타아제를 만들 수 있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납니다. 그래야 엄마 젖을 먹고 소화할 수 있으니까요. 아기가 태어나서 모든 영양을 모유로 해결하는 동안에는 락타아제를 만드는 유전자가 활발한 활동을 합니다. 그러다 이유기를 거치면서 락타아제를 점점 덜 만들게 됩니다. 젖을 떼고 어른이 먹는 음식에 의존할수록 락타아제는 더욱 줄어들고, 그 대신 다른 소화효소들이 많이 만들어집니다. 어른이 되면 락타아제를 만드는 유전자는 활동을 멈춥니다. 따라서 우유를 소화시킬 수 없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실제로 지구 곳곳의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인류학자들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전 세계에서 우유를 마실 수 있는 어른은 인구집단별로 약 1∼10%에 불과합니다. 아시아의 대부분, 아프리카의 대부분, 유럽의 상당 부분에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돼서도 우유를 마실 수 있는 ‘특이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지역이 있습니다. 유럽의 스웨덴 덴마크, 아프리카의 수단, 그리고 중동의 요르단 아프가니스탄 등입니다. 이들 지역에서는 어른이 돼도 몸에서 락타아제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비율이 70∼90%나 됩니다.
이렇게 어른도 우유를 마실 수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지역은 모두 오랫동안 목축업과 낙농업을 해 오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우유를 비롯한 유제품이 음식의 주를 이룹니다. 이 지역 어른들의 몸은 계속해서 락타아제를 만들어 냅니다. 유전학자와 인류학자들이 연구해 보니 이들의 락타아제 유전자엔 돌연변이가 있었습니다. 이 돌연변이가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약 1만 년 전부터였습니다. 낙농업이 시작될 무렵의 일이지요.
○ 락타아제 유전자 돌연변이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1만 년 전은 대단히 최근의 일입니다. 이때 발생한 돌연변이가 이들 지역에서 성인 인구 중 최고 90%를 차지할 정도로 빠르게 증가하려면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돌연변이가 증가한다는 건 그 돌연변이 유전자(여기서는 락타아제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후손을 많이 남겼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돌연변이가 없는 사람들은 일찍 죽거나 후손을 많이 남기지 못했을 겁니다.
우유를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오래, 많이 살아남았다는 건 우유에 삶과 죽음을 가를 정도로 중요한 기능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인류학자들은 원인을 밝히기 위해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 탐구했습니다.
먼저 우유를 마시면 키가 크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있습니다. 확실히 우유를 많이 마시는 서북 유럽 사람들은 키가 큽니다. 다만 이들이 키가 큰 이유가 단지 우유를 많이 마시기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유의 성분 중에 어떤 성분이 키와 몸집을 키우는지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칼슘과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서라는 가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칼슘과 단백질을 얻기 위해서라면 우유 대신 소화하기 쉬운 치즈나 요구르트를 먹어도 됩니다(우유를 발효시키는 과정에서 락토오스가 소화되기 쉬운 형태로 변합니다). 이렇게 ‘문화적인 방법’을 통해 적응하면 되는데 굳이 돌연변이라는 ‘생물학적인 방법’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실제로 중동 지역에서는 낙농업이 발달했지만 서북 유럽에 비해 락타아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어른들의 비율이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치즈나 요구르트 등 유제품의 형태로 우유를 섭취하는 문화 때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유를 통해 비타민D를 섭취하기 위해서라는 가설도 있습니다. 비타민D는 몸에서 칼슘을 흡수하는 데 중요한 성분입니다. 햇빛 속의 자외선을 받아 몸에서 직접 만들어내는 유일한 비타민입니다. 실제로 서북 유럽은 햇빛이 잘 들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가설이 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을 보면 맞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햇빛이 잘 드는 지역인데도 락타아제 유전자를 지닌 비율이 높은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의 수단이 대표적입니다.
결국 우유의 어떤 성분이 삶과 죽음을 갈랐는지는 아직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우유와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한때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고 농경문화가 발달하면서 인류가 더는 진화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전학과 인류학 연구를 통해 새롭게 드러난 인류의 모습은 다릅니다. 지난 500만 년 동안과 마찬가지로 인류는 최근 1만 년 사이에도 왕성하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상희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인류학과 교수 sang-hee.lee@ucr.edu 정리=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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