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인간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하다. 셸 실버스타인의 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 한 인간에게 모든 걸 허락하고 마지막 남은 그루터기까지 앉으라고 내주는 나무를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야 만다. 나무는 공기 정화에서부터 과실, 목재 같은 쓰임새 말고도 한여름 녹음의 초록 빛깔이 주는 정서적 위안이나 시원한 그늘 때문에 인간과 더욱 친숙하게 교감한다.
○ 퇴계 가문의 정자나무
특히 예로부터 정자나무라고 마을 어귀에 심은 나무들은 나이를 더해갈수록 가지와 잎이 우거져 널따란 그늘을 만들었다. 주민들이 그 아래서 쉬어 가거나 마을 일을 논의하기도 하는 일종의 사랑방이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자나무로는 느티나무와 팽나무, 은행나무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그늘로만 따지자면 이제 이야기할 경북 안동시 와룡면에 있는 향나무를 꼽고 싶다.
향나무는 나무줄기에서 나는 독특한 향이 부정(不淨)을 제거하고 정신을 맑게 해 신명(神明)과도 통한다 해서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제사나 불가 의식에 사용했다. 그래서 옛 선비들이 사는 집이나 절집에는 잘 자란 향나무가 많이 보인다. 와룡면의 이 향나무도 고풍스러운 한옥을 배경으로 자라고 있다. 진성(眞城) 이씨 이정(李禎)의 종택(宗宅)이다.
이정은 퇴계 이황의 증조부로 세종 때 영변판관으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방을 정비했던 인물이다. 그가 귀향할 때 가지고 와서 심은 나무가 지금 마당에 있는 향나무(천연기념물 314호)다. 기록에 따르면 수령이 600년 남짓한 이 나무는 키가 3m를 겨우 넘는다. 그 대신 동서로는 14.7m, 남북으로는 12.2m나 뻗어나가 우산을 펼친 듯 진귀하다. 향나무 중에서도 이런 변종을 뚝향나무라고 부른다.
○ 아낌없이 주는 그늘
뚝향나무는 마치 앉아 있는 것처럼 낮게 깔려 있다고 해서 ‘앉은 향나무’라고도 한다. 강이나 바닷가의 둑을 보호하려고 심었기 때문에 뚝향나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우리나라 특산종이다. 사실 우산 형태의 유명한 나무는 반송(盤松)을 대표하는 석송령(천연기념물 294호)이나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천연기념물 180호) 등이 있다. 하지만 내가 이 뚝향나무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나무 주위로 울타리를 만들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나무에 다가가 그늘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다는 데 있다. 자고로 숲은 들어가 보아야 알고 나무는 그늘 속에 묻혀 올려 보아야 제맛이 아니던가.
뚝향나무 아래 놓인 벤치에 앉아 여름 오후의 짙은 그늘을 만끽했다. 이 나무는 지금도 옆으로만 자라고 있다고 한다. 그늘은 점점 넓어지고 있는 셈이다.
나는 600여 년의 세월 동안 이 그늘 아래 앉아 쉬어 갔을 많은 사람을 떠올려 보았다. 그들의 이야기와 웃음을 모두 지켜봤을 말 없는 나무의 넉넉한 품을 생각하니 사시사철 푸른 향나무가 비밀이라도 굳게 지켜온 친구처럼 든든하다.
향나무는 특성상 태울 때에만 그 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 나무도 생명체인 이상 언젠가는 생을 맺을 것이다. 그때까지 더욱 넓어질 그늘 아래 더욱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을 수 있으리라. 천수를 다해 자신의 몸을 태우는 날이 오면 많은 이들의 추억을 담아 가장 아름다운 향을 내지 않을까.
나는 가지 사이로 내비치는 햇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나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하게 서서 시원한 그늘을 아낌없이 드리워주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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