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사람들도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애완동물을 기르고 사랑했을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O2가 조선왕조실록과 산림경제, 성호사설 등 각종 문헌을 뒤지고 관련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해 봤다. 그러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시대 동물 관련 기록과 사실들이 드러났다. 흥미진진한 조선시대 동물 이야기 속으로 함께 떠나 보자. 》 ‘왕은 항상 내정(內政)에 강아지 한 마리를 길렀는데, 그 턱밑에 방울을 달아 강아지가 방울 소리를 듣고 놀라 뛰면 이것을 매양 재미로 여겼다.’(조선왕조실록, 1506년 5월 19일)
왕은 개뿐만 아니라 고양이도 사랑했다. 내관이 대전(大殿)에서 기르던 고양이로 사옹원(司饔院·궁중의 음식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서 쥐를 잡다 고양이를 놓친 일이 있었다. 그러자 의금부에서 관련자를 형장(刑杖)으로 때려 심문하게 했다.
동물을 좋아했던 이 군주는 바로 연산군. 동물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역대 왕들 중 최고 수준이었다. 연산군일기 여기저기에 동물과 관련한 내용이 등장한다. 영의정 한치형 등은 연산군 7년(1501년) 5월 6일 “궁궐 안에 사냥개를 많이 길러서 때로는 조회(朝會) 때에 함부로 드나드니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라고 고했다. 개를 좋아했던 왕은 같은 해 3월 “친열(親閱·왕이 직접 군대를 사열함)할 때에 군졸 10명이 응방(鷹坊·매의 사육과 사냥을 맡았던 관청)의 사냥개 10마리를 끌고 어가(御駕)를 호위하라”고 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물들도 연산군의 광기를 피해 가지 못했다. 연산군 10년(1504년) 왕은 진기한 새와 짐승을 잡아 바치라고 명했다. 무사들을 파견해 호랑이, 표범, 곰, 말곰(불곰의 아종) 등을 산 채로 잡아다 후원에 가둬놓았다. 그러고는 혹은 고기를 먹이며 구경하기도 하고 혹은 친히 쏘아 죽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흡사 ‘조선판 네로 황제’ 같은 모습이었다. ○ 숙종을 따라 죽은 고양이
연산군과 달리 오늘날의 ‘반려동물’을 대하듯 동물을 사랑했던 왕들도 있었다. 숙종의 금빛 고양이(金猫) ‘금손’은 왕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숙종은 금손이를 밥상 옆에 앉혀놓고 고기반찬을 손수 먹였다고 전해진다. 고양이 팔자에 신하들보다 왕을 더 가까이하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금손이는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식음을 전폐하다 죽었다. 사람들이 명릉(明陵) 곁에 묻어줬다.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대저 개와 말도 주인을 생각한다는 말은 옛적부터 있지만, 고양이란 성질이 매우 사나운 것이므로, 비록 여러 해를 길들여 친하게 만들었다 해도, 하루아침만 제 비위에 틀리면 갑자기 주인도 아는 체하지 않고 가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금묘 같은 사실은 참으로 이상하다’고 적었다.
성종 또한 동물애호가였다. 그는 사슴과 원숭이, 백조 등을 궁궐 안에서 키웠다. 성종은 유구국(오늘날의 오키나와)에서 바친 원숭이에게 옷을 입히는 것과 관련해 신하들과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좌부승지 손비장은 “사람의 옷을 상서롭지 못한 짐승에게 입힐 수 없습니다. 한 벌의 옷이라면 한 사람의 백성이 추위에 얼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고 간언했다. 이에 임금은 “외국에서 바친 것을 추위에 얼어 죽게 하는 것은 불가하다”며 원숭이 편을 들었다.
○ 왕이 애완동물을 길러 가뭄 왔다?
유구의 원숭이 이야기가 나왔지만 조선의 국왕에게는 외국의 진기한 동물들이 선물로 바쳐졌다. 대표적인 것이 원숭이와 코끼리, 낙타, 앵무새 등이었다. 그런데 국내외산을 막론하고 왕의 애완동물은 신하들에게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신하들이 왕에게 동물을 키우지 말라고 간언하는 장면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원숭이 옷 입히기 논쟁’ 때도 그랬다. 손비장은 왕에게 “신은 전하께서 노리개(애완물·愛玩物)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관(史官)이 ‘원숭이를 기르라고 했다’고 책에 쓴다면 훗날 전하께서 진기한 노리개를 좋아했다고 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하겠습니까”라며 애완동물 기르기를 질책했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은 신하들이 왕의 애완동물 사육에 부정적이었던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성리학적 통치이념이었다. 성리학은 왕에게 도인(道人) 수준의 인격 수양을 요구했다. 왕이 군자처럼 수양하며 덕을 쌓아야 나라가 태평해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군자(왕)는 ‘정신을 흩트리는’ 잡기에 빠지면 안 됐다. 신하들은 심지어 그림 그리기나 서예 같은 취미활동을 삼갈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두 번째는 민생 및 경제사정 때문이었다. 농본주의를 제창했던 조선에서 애완동물은 귀중한 곡식을 축내는 존재로 비칠 수도 있었다. 태종 11년(1411년) 일본에서 선물한 코끼리에 대한 기록엔 “곡식을 엄청나게 많이 먹는다(왕이 사복시에서 코끼리를 기르게 했는데 날마다 콩 4∼5말을 먹어치웠다)”는 내용이 거듭 등장한다. 급기야 이 코끼리는 침을 뱉으며 자신을 놀린 사람을 밟아 죽였고, 이후 귀양을 가 전국을 떠돌다 세종 때 죽었다.
고려 시대부터 왕족과 권세가들의 중요한 여가활동이었던 매 사냥은 매가 잡은 짐승을 주우러 가는 말이 논밭을 망칠 수 있다는 이유로 경계의 대상이 됐다. 성종 17년(1486년) 경연에서는 매를 기르는 것을 두고 왕과 신하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정5품 신종호는 “전하께서 해청(海靑·매)을 기르고 철망으로 새장을 만들어 들이게 하심은 완호(玩好·곁에 두고 좋아함)하는 일에 뜻을 두심이니 어찌 하늘을 공경하고 걱정하며 근면하는 데 있어서의 성실함이라 하겠습니까?”라며 은근히 가뭄의 책임이 왕에게도 있다고 힐난했다.
이에 대해 성종은 “재변이 오는 이유야 내가 덕이 없어서 그렇지, 어찌 해청의 소치이겠는가. 매를 날려 보낸다 하더라도 반드시 비가 오게 할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하겠다”고 받아쳤다
정창권 고려대 교수(국문학)에 따르면 성종과 해청 이야기는 예전 사람들이 가졌던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사람과 하늘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을 대변한다. 이런 믿음은 사람들이 자연 현상에 항상 관심을 기울이게 했다. 조선시대의 기록 곳곳에는 흰 짐승(사슴, 까치 등)이 나타나니 나라에 경사가 있을 징조라거나 개 또는 고양이가 기형인 새끼를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하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 강아지 두 마리를 얻은 기쁨
왕뿐만 아 니라 민간에서도 여러 가지 동물을 길렀다. 개와 고양이는 물론이고 금붕어와 오리, 거위, 원앙, 그리고 두루미를 사육했다는 기록도 있다. 산림경제(山林經濟·조선 숙종 때 실학자 홍만선이 엮은 농서 겸 가정생활서)에는 꿩, 물오리, 원앙 등 야생 조류의 알을 주워다 닭에게 품게 해 부화시키는 방법이 소개돼 있다.
동물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중국에 사신으로 간 사대부들은 이국의 동물들을 신기해하며 그들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재주를 부리는 곰과 개, 말하는 앵무새, 유리병에 금붕어를 넣어 키우는 풍속 등이 자세하게 남아 있다.
애완동물을 기르는 기쁨 역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동물에 대한 사랑과 그들과의 교감을 글로 남겼다.
다산 정약용의 시 산거잡흥(山居雜興) 20수 중에는 ‘고양이도 오게 하여 이마를 쓰다듬으며/자애로운 불심으로 손자처럼 대한다네’란 대목이 있다. 경기도 수리산 아래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선비 이응희(1579∼1651)는 ‘강아지 두 마리를 얻고(得二狗子)’란 시를 남겼다.
‘개는 무심한 동물이 아니니/닭 돼지와는 비길 수 없어라/예전에 묵은 손님을 때로 반기고/밤에 가는 사람 잘도 알고 짖는다/짐승을 잡는 재주 매우 민첩하고/염탐할 때 청력은 귀신 같아라/이웃집에서 새끼 몇 마리 주니/보살펴 기름은 응당 다 같으리’ ▼ 학 잘 기르는 법 여러 문헌 등장… 춘향전에도 한쌍 ▼
■ 두루미, 애완동물 증거는
얼마 전 ‘조선시대에는 두루미(학·鶴의 우리말)를 애완동물로 길렀다’는 발표(국립생물자원관)가 큰 화제가 됐다. 그러나 구체적인 설명은 많지 않아 아쉬운 감이 있었다.
옛 문헌을 살펴보면 실제로 두루미를 사육했다는 증거가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산림경제 제2권에는 ‘학을 기르는 데는 오직 울음소리가 맑은 것을 최고로 치며, 긴 목에 다리가 멀쑥한 것이 좋다. 학이 병들었을 때는 뱀이나 쥐 또는 보리를 삶아 먹인다’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조선 중기 문신 윤의립(1568∼1643)은 산가청사(山家淸事)에서 ‘학을 집 안에서 기를 때는 반드시 물과 대나무를 가까이 두고 물고기와 벼를 주어야 한다’고 썼다. 16세기의 명필 황기로(1521∼1567)는 경상도 구미의 낙동강 강가에 매화를 심고 학을 키우며 말년을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지은 정자가 현재 경북도 기념물 제16호인 매학정(梅鶴亭)이다. 우리 조상들은 두루미가 고고한 선비의 기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귀하게 여겼다.
문학 작품에도 두루미 사육과 관련한 대목들이 있다. 춘향전의 여러 이본(異本)에 춘향의 집에서 두루미를 키웠다는 내용이 나온다. 다음은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일부러 거지꼴을 하고 춘향의 집을 찾아가 하는 말이다. ‘전에 내가 있을 적에는 수미산 학두루미 한 자웅이 있었더니 한 마리는 어디 가고 다만 한 마리 남은 거는….’(박동진 창본 춘향가) 박지원의 양반전에는 ‘방에는 귀엣고리(귀를 장식하는 주옥) 요란한 기생들이요, 정원 나무에는 목청 좋게 우는 학을 키운다’는 대목이 있다.
학 문화 전문가인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은 조선과 일본의 외교 기록에서 학 사육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조선에 학을 달라고 요구한 게 여러 차례였습니다. 조선에선 한 번에 최고 10마리의 두루미를 주었지요. 그 정도 요구를 들어줄 수 있다는 것은 사육 개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편 김 고문은 최근 화제가 된 내용 중 ‘선비들이 두루미의 깃털을 잘라내 집에 놓고 날아가지 못하게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했다. 길들여진 두루미는 풀어놓아도 날아가지 않고 사람을 잘 따르기 때문이다. 김 고문은 현재 경북대 조류생태환경연구소의 연구위원으로 두루미(일본에서 도입) 사육에 참여하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