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앉아 함께 밥을 먹던, 하얀 가운을 걸친 병원 동료들이 마법처럼 벌떡 일어나 사라진다. 이 정도면 해리 포터가 외치는 마법의 주문이 부럽지 않다. ‘윙가르디움 레비오사(물체를 공중에 띄우는 주문)’ ‘스투페파이(상대방을 기절시키는 주문)’같이 입에 척 달라붙지도 않는 주문보다 외우기도 쉽고 효율적이다. 단 여섯 글자만 외치면 두 가지 마법이 동시에 펼쳐진다. 상대방의 엉덩이를 의자에서 떨어지게 하고, 주위가 진공 상태가 된 듯한 고요함이 일순 찾아온다.
해리보다 더 뛰어나게 마법을 구사하는 이 녀석. 18세 강경준(신원호)이다. 하지만 몸은 30세 서윤재(공유). 12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었지만 어른보다 더 어른스럽다. 여자 주인공 길다란(이민정)이 자신의 약혼자 몸에 깃든, 제자인 그에게 조금씩 사랑을 느끼는 것도 충분히 이해된다. 이왕 ‘버린’ 몸, 머릿속만 채우면 어른이랑 똑같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를 보며 코웃음 치던 것이 민망해진다.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늘어놓는 어린 환자들 앞에서 경준이 또 한번 마법의 주문을 외친다. 하지만 꼬맹이의 대답은 “응?”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이 녀석은 친절하게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내린다. “귀찮은 친구 떼 내는 데는 이 방법이 최고야. 너도 어른 되면 한번 써먹어 봐.”
오호. 간만에 만난 대학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그 녀석의 마법 주문을 따라해 본다(물론 친구들이 귀찮았던 것은 아니다). “보증 좀 서 줄래?” 항상 감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는 A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B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받는다. “에이 왜 이래, 부모자식 간에도 보증은 서면 안 되는 거야.” 그래, B야. 아주 너답다. 이제 C밖에 안 남았다. “네가 공유냐?” C, 너마저…. 시청률 10%도 안 되는 드라마인데, 넌 도대체 왜 그걸 보는 거냐.
그러더니 드라마에 출연 중인 걸그룹 미쓰에이의 수지와 배우 이민정 중 누가 더 예쁜지를 두고 자기들끼리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나 수지 직접 봤어.” 그제야 세 사람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한다. 짙은 부러움이 눈길에 묻어 난다. “어때? 어때?”
마법은 실패했다. 그 누구의 엉덩이도 떨어지지 않고, 고요함도 찾아오지 않았다. 남은 것은 혀끝에 맴도는 소주와 뒤엉킨 약간의 씁쓸함뿐.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되게 중요한 일이 있었거든. 나 먼저 가볼게”라는 서윤재의 친구처럼 어설프지 않게,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 적당한 말을 찾아낼 수 있는 것. 그리고 그런 말들은 경준이가 훌쩍 뛰어 넘어버린 시간들 속에서 나오는 ‘생활의 지혜’다.
동명의 미국 영화 ‘빅’(1988년)에서 열세 살 조슈도 어느 날 갑자기 서른 살의 어른으로 변해 버린다. 그런 영화에서 늘 그렇지만, 몸만 어른이 된 그는 완구회사에서 승승장구하며 엄청나게 잘나가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도 생긴다. 하지만 조슈는 처음 소원을 빌었던 게임기 ‘졸타’ 앞에서 다시 아이로 돌아가길 선택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수잔에게 자신과 함께 어린 시절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수잔은 거절한다.
“난 이미 겪어 봤어. 한번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어. 무슨 말인지 알아?”
안다. 하지만 내가 ‘졸타’ 앞에 선다면, 기꺼이 조슈와 함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 더 많이 아팠다면 지금보다 더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동그라미 동아일보 기자. 동그라미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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