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되는 불경기에도 올 해외여행객 수가 5년 전 기록한 사상 최고치(1230만 명)를 넘어설 것(1236만 명)으로 예상된다. 국민의 해외여행은 그 자체로 외화 지출로 이어진다. 어렵사리 번 외화가 낭비되지 않으려면 국내 휴가객이 늘어야 한다. 그래서 외국에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전남 신안의 섬-하의도 신도 도초도 비금도-을 찾았다. 천연 미인처럼 자연의 풍치가 빛나는 네 섬을 소개한다.》
DJ의 고향 하의도
신안군은 독특하다. 오로지 섬뿐이다. 그 수는 1004개(유인도 72개). 그래서 ‘천사의 섬’이다. 그중 하의도는 목포 서남쪽 57km. 북항(목포)에서 쾌속선으로 한 시간 걸린다. 그 지명은 귀에 익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이어서다. ‘하의(荷衣)’란 연꽃 형상. 옛날엔 그랬다는데 지금은 아니다. 염전을 들이느라 곳곳에 방조제를 쌓는 바람에 바뀐 해안선 탓이다.
배를 내린 곳은 웅곡 나루터(선착장). 큰 마을 ‘대리(大里)’를 벗어나자 들판이 펼쳐지는데 온통 소금밭(염전)이다. 이름 하여 후광(後廣)리, 김 전 대통령이 호를 삼은 고향마을이다. 후광은 큰 마을 뒤로 펼쳐진 너른 들판이란 뜻. 김 전 대통령은 초등학교 4학년(1936년) 가을, 목포로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생가는 자그만 논 너머 소금밭 들판과 마주한 ‘一’자형 초가다. 네 칸 방은 옛 사진과 자료 전시장. 해설사도 상주한다. ‘김대중 전기’엔 고향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배어 있다. 농사짓던 부친은 동네 구장이었고 집안은 그냥 살 만했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주낙배도 갖고 있었다. 소년 대중은 그 배를 타고 주낙을 던져 물고기도 잡고 아이들과 어울려 콩서리도 다녔단다.
대리엔 ‘초암강당’이 있다. 한학자 초암 김연(1883∼1959)이 학동을 가르치던 서당이다. 김 전 대통령도 하의보통학교 편입(2학년) 때까지 여기서 배웠다. 근처 ‘하의3도 농민운동기념관’은 빼앗긴 땅을 찾기 위해 무려 350년간 법정투쟁을 벌인 세 섬 농민들의 역사를 전시한 ‘징’한 곳. 압제에도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인고의 삶을 살아온 후광의 인동초(忍冬草) 정신, 그 뿌리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하의도의 보물, 모래구미와 ‘큰 바위 얼굴’
하의도에는 소문나지 않은 해변이 있다. 모래구미(어은리)다. 신안 섬이 다 그렇지만 개펄은 섬 동쪽에 발달했다. 모래해변은 죄다 섬 서쪽에 있다. 서남쪽 모래구미는 서부해안일주도로(6.4km)로 찾아간다. 해질 녘 풍광이 멋진 길이다. 해변은 바다로 돌출한 양편 바위해안 사이에 걸친 초승달 모양이다. 금빛 모래밭엔 어떤 인공시설물도 없다. 배후 솔숲에 ‘몽골텐트’―사각평상을 갖춘 원두막 형―가 보인다. 여름철 도내 해변마다 설치하는 휴게시설로 마을에서 운영(9동)한다. 식수와 샤워시설은 무료. 넓고 완만한 해변은 파도도 잔잔해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에게 적당해 보인다.
일주도로로 조금 더 남쪽으로 가면 ‘큰 바위 얼굴’을 보게 된다. 코 앞 작은 섬(무인도)의 왼편 끄트머리에 있는데 영락없는 사람의 얼굴 옆모습이다. 푹 팬 눈과 날카로운 콧날, 머리카락 덮인 이마와 턱선이 또렷하다. 그 너머 나지막이 누운 듯한 섬은 신도. 낙도분교 어린이의 서울 수학여행을 그린 영화 ‘우리 선생님’(주연 오수아 유승호)의 무대다. 30여 가구가 사는데 하의도에서 매일 두 차례 배가 오간다(40분 소요).
신도해변도 숨겨진 보물이다. 포구의 안마을에서 트럭 짐칸에 올라타고 찾아간 언덕 너머 3km 거리의 안태(7가구). 대나무 숲 터널을 통과하자 무릉도원처럼 바다가 펼쳐진다. 해변은 모래구미를 쏙 뺐다. 해변엔 덤장이 있다. 이 장막형 그물은 물 날 때 물고기가 걸리도록 만든 친환경 전통어업의 하나. 해변엔 민박도 한 집 있다.
경치 좋은 부자 섬, 도초도와 비금도
이튿날 찾은 도초도. 하의도와 이웃한 큰 섬이다. 이 섬은 비금도와 늘 한 쌍으로 언급된다.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있는 데다 다리(서남문대교·937m)로 연결돼서다. 두 섬엔 공통점이 있다. 발달된 평지에서 농사가 주업이란 것인데 거기엔 소금농사(염전)도 든다. 부자 섬이란 것도 같다.
목포발 카페리가 닿은 곳은 화도(火島)나루터(도초도). 마을안길 불섬로를 지나 서남해의 명품 해변을 찾았다. 엄목리 시목해변이다. 삼면이 야트막한 산에 둘러싸인 반달형 해변은 고즈넉한 풍치가 압권이다. 거기도 배후 송림에 몽골텐트가 있다. 모래밭 덤장을 보니 꽃게며 밴댕이, 새끼 광어가 여기저기 걸렸다. 여기선 맛(길쭉한 모습의 조개) 잡기 체험도 한다. 맛은 모래개펄 구멍 아래에 숨어 있다. 거길 삽으로 살짝 떠낸 뒤 맛소금을 뿌린다. 그러면 모래 속 맛이 긴 촉수를 빼어 소금을 더듬는데 그때 손으로 잡아챈다.
다리 건너 비금도에 들어섰다. 이 섬도 큰 섬 4개가 서북쪽에서 밀려온 모래로 한 섬이 됐다. 주변 작은 섬도 간척사업으로 땅에 포섭됐다. 섬 내 ‘도(島)’자 지명의 땅―신창도 목도 만자도 두도―이 그 흔적이다. 귀양길에 오른 정약용 정약전 형제도 이 섬에 머문 적이 있다고 한다. 흑산도로 오인한 관리의 실수 탓이다, 여기서 흑산도는 뱃길로 한 시간 거리다.
비금도는 천일염의 메카다. 남한 최초의 염전 ‘구림 1호’(1947년)와 1948년 섬 주민 450가구가 공동 조성한 ‘대동염전’(150ha·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이어 1951년 조성된 대성염전(100ha)이 모두 여기에 있다. 1958년엔 천일염이 전매사업에서 풀렸다. 덕분에 비금도 소금밭은 ‘금을 불러들이는 소금(召金)밭’이 됐다. 최고전성기는 1962년. 화폐개혁 직후 환금성 높은 소금에 돈이 몰리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것. ‘독수리가 나는 형상’의 비금도(飛禽島)는 ‘금이 날아다니는’ 비금도(飛金島)로 불렸다. 구림 1호(2ha)를 조성한 염전의 시조는 섬 주민 박삼만 씨. 강제징용 당해 끌려간 북한 염전(평남 주을)에서 배운 기술로 귀향 후 남한 최초의 염전을 일궜다. 고향 수림마을엔 동상도 있다.
비금도는 부자 섬으로 통한다. 다양한 농산물 덕분인데 주역은 ‘천사의 찬’이라는 ‘섬초’(브랜드 시금치)다. 올해엔 ‘여름 섬초’까지 냈다. 단호박 깨 양파 대파 마늘도 게르마늄 성분이 풍부한 토질 덕에 맛이 좋다. 3기작―한 토지에서 연중 세 번 소출―의 좋은 기후도 한몫한다. 천재 바둑기사 이세돌도 더불어 자랑거리다. 도고마을 태생으로 폐교를 활용해 조성한 ‘이세돌 바둑기념관’도 있다.
비금도 지형은 ‘ㄱ’자를 왼쪽으로 누인 모습이다. 그래서 북쪽의 긴 해안선에 모래가 쌓여 해변이 6개나 된다. 그중 명소는 2.8km 명사십리와 그 양편에 인접한 논드레미와 원평(1.3km), 남쪽의 선왕산(해발 255m) 자락의 하트 모양 해변 하누넘(500m)이다. 명사십리에선 마을 주민에게 요청하면 덤장과 휘리 체험도 할 수 있다. 휘리는 덤장의 긴 그물을 여러 사람이 직접 물속에 갖고 들어가 해변으로 끌고 나오면서 잡는 것. 수림리 쪽 해변은 풍력발전기(3기·수림리 소재) 덕분에 독특한 풍치가 펼쳐진다. 하누넘의 하트 해변은 산중턱의 해안도로를 타고 가면서 보는데 전망대에서 봐야 하트 모양으로 보인다. 명사십리 해변의 배후마을(3개)인 수림리와 우산마을에는 마을 소득 사업으로 운영하는 펜션도 있다. 바닷가에 자리 잡아 경치가 그만이다.
비금도 여행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우실이다. 하누넘 재를 타고 넘는 북서풍을 막기 위해 고갯마루에 높이 3m로 쌓은 자연석 돌담(길이 40m)이다. 돌담은 재 너머 선왕산 자락의 내월리 마을에서 예쁜 골목 담으로 환생한다. 신안 섬은 제철 생선 맛보기의 명소
비금도를 잇는 서남문대교의 상판이 지붕처럼 드리워진 도초도의 화도나루터. 거긴 회식당 7개가 줄지어 있다. 게서 맛본 광어와 농어회. 여기선 모든 생선회가 자연산이란다. 섬에서 한여름 별미는 장어구이다. 장어는 막 잡은 것을 배에서 직접 사서 삼겹살처럼 숯불에 구워 먹는다. 장어는 선장이 장만해서 파는데 1kg에 1만8000원 선.
요즘 섬에서 많이 나는 생선은 간자미(가오리의 새끼)와 병어다. 낙지는 연중 나지만 역시 가을 것이 최고. 신안낙지라면 비금 도초 압해 세 섬의 개펄에서 손으로 잡아야 제격. 아삭거리는 식감이 없다면 신안 개펄낙지가 아니다. 섬에서 양식하는 건 전복과 다시마, 김뿐. 다시마는 전복 먹이로 키운다. 섬 소금으로 담근 새우젓도 특산품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