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문화사
도널드 서순 지음·오숙은 외 옮김/전 5권·500∼672쪽·각권 2만8000원·뿌리와이파리
기자는 석 달 전 스페인 도시 5곳을 홀로 여행했다. 난생 첫 유럽 여행…. 손에 쥔 지도에는 프라도 미술관, 피카소 미술관, 후안 미로 미술관,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등등 도시를 대표한다는 미술관마다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이드북에 소개된 명소들의 8할은 성당 아니면 미술관이었다. 깃발을 꽂듯이 대표작들을 찾아 부지런히 뛰어다녔고, 평소 한국에서는 잘 듣지도 않는 오디오 해설(무려 영어였다)을 들으며 ‘폼을 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기억에 남는 건 “나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프란시스코 고야의 ‘옷을 벗은 마야’를 봤다”라는 정도뿐이다. 애석하게도.
미술을 빼놓고 유럽의 문화사를 논할 수 있을까. 이 책의 답은 ‘예스’다. 이 책이 담은 내용은 유럽문화사라기보다 ‘유럽근대문화산업사’에 가깝다. 산업혁명 이후인 19세기에 유행했던 음악과 신문, 소설, 연극부터 20세기의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그리고 게임까지 다양한 형식의 문화를 총망라한 백과사전식 유럽문화통사다. 방학을 이용해 유럽여행을 계획한 이들 가운데 기자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무지한(!) 감식안을 가진 독자가 있다면 주목해볼 만하다.
동아일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영국 런던대 퀸메리칼리지 유럽비교사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미술을 배제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문화란 단어는 넓은 의미를 포함한다. 만화도 그래픽디자인도 책에 삽입된 일러스트레이션도 모두 미술이다. 하지만 유럽을 이야기할 때의 ‘미술’은 흔히 한정된 엘리트들을 겨냥해 예술이라고 규정한 유일무이한 물건을 매매하는 투기시장을 전제로 한다.” 그가 2001년 ‘모나리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는 게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유럽인들이 문화 콘텐츠를 어떤 방식으로 소비하는지 면밀히 관찰했다”고 설명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를 구분하는 행위를 마케팅으로 해석했다는 것. 오늘날 고급문화로 분류되는 문화상품들은 산업화 이후 문화적 가치의 위계서열을 규정하는 투쟁 과정에서 다른 사회집단과 차별화를 담보하는 마케팅 전략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특히 ‘저급문화’로 치부되는 분야와 산업 양상을 이 책은 생생히 서술한다. 지난 200년간 유럽의 보통 사람들이 밥벌이를 하고 남는 시간에 삶을 즐기거나 시름을 잊는 방식을 조명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기존의 문화사 연구들이 개별 작품의 내용을 소개하거나 평가하는 것에 그쳤다면 이 책은 출판업자, 편집자, 서적상, 도서대여점 등으로 이뤄진 소설의 상업적 그물망, 오페라하우스와 연주회장의 운영이나 가수의 벌이와 위상, 카바레나 민중극이 인기를 얻은 이유 같은 구체적 일상사를 파고들었다.
20세기를 다룬 후반부는 유럽시장을 정복하는 미국 대중문화의 힘과 그 대척점에 서 있던 유럽의 일부 흐름에 대해서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배우가 아닌 사업가로서의 찰리 채플린을 조명한 대목이나 미국 연재만화를 혐오했던 유럽 문화 엘리트에 대한 내용이 대표적이다. 다만 통상적인 유럽문화사의 국가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한계로 지목할 만하다. 대부분의 사례가 영국이나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남유럽 몇몇 국가 위주라는 점도 아쉽다.
총 2790쪽, 5권에 걸친 방대한 분량이 독자를 압도하고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지만 무겁지 않은 서술 덕에 책장은 쉽게 넘어가는 편이다. 저자는 e메일 인터뷰에서 넉살 좋게 “내가 생각해도 길긴 길다. 꼭 처음부터 끝까지 강제로 읽을 필요는 없다”며 “우선 처음과 마지막 챕터를 읽은 뒤 개인의 취향에 맞춰 골라 읽기를 권한다”고 말했다. 이어 “문화가 상품으로서 생산과 유통에 있어 중요한 변화를 거친 시기를 다룬 4권 ‘혁명’은 꼭 읽어봤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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