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하고 진지한 연극은 사절, 재미있고 웃기는 연극은 환영. 대한민국 공연 1번지라는 대학로의 요즘 관극(觀劇) 풍경이다. 티켓 판매의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작품들은 웃음을 담보하는 코미디나 통속 연애극이 대다수다. 가끔 비극 작품이 끼었다고 해봤자 꽃미남 배우들의 동성애 코드로 무장한 야릇한 작품이기 십상이다.
오랜만에 대학로 무대로 돌아온 사람들은 이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기 일쑤다. 대학로에 상업극이 범람하고 있다며 혀를 끌끌 찬다. 하지만 제작진의 책임이기만 하겠는가. 본디 비극은 호황기에 번성하고 희극은 불황기에 창성하기 마련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때 정신적 허기를 채우려는 욕망이 강해지는 법이다. 현실이 고단하고 힘들 때는 잠시라도 현실을 잊게 해줄 위락거리를 찾는 게 인지상정이다.
29일까지 서울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공연한 극단 걸판의 ‘그와 그녀의 옷장’(오세혁 작·연출)은 이런 대중심리를 꿰뚫어 봤다. 연극은 2대에 걸쳐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비극적 가족사를 다루면서 명랑 웹툰의 문법으로 이를 소화해냈다.
내용만 놓고 보면 1980년대를 풍미했던 운동권 연극이 따로 없다. 아파트 경비인 아버지 강호남(김태현)은 관리비 절감 차원에서 2명의 경비를 1명으로 줄이겠다는 통보를 받고 죽마고우인 옆 동 경비와 생존경쟁에 내몰린다. 어머니 오순심(최현미)은 구내식당에서 일하다 하루아침에 쫓겨날 위기에 처해 무기한 농성 중이다. 그들의 자랑거리인 막내아들 강수일(강동호)은 대기업에 취직해 비정규직의 설움을 한꺼번에 날려버린다. 하지만 어머니는 농성하는 자신들을 강제 해산하려고 회사에서 동원한 용역직원들 사이에서 아들을 발견한다.
이쯤 되면 ‘가난을 대물림하는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목청껏 비판하고 나설 법하다. 하지만 연극은 그런 거대담론엔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그 대신 그런 구조적 문제 속에서도 유머와 자기풍자의 정신을 잃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목한다.
환갑이 다 된 호남은 자신의 옷장을 가득 채운 작업복을 보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노라고 너스레를 떨지만 알고 보면 마음이 약해 구조조정 때마다 딱한 동료들 대신 거리로 나앉았기 때문이다. 생활력 강한 순심은 아들만은 비정규직으로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악착같이 살아왔건만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그 일념이 이뤄진 순간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역설에 직면한다. 결국 양복을 벗고 작업복을 입은 아들 수일은 거룩한 대의명분 때문이 아니라 한 여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노동운동가로 변신한다.
남 보기엔 대단한 노동투사 같지만 하나같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다. 호남은 연신 액션만화 속 주인공 같은 대사를 내뱉고, 순심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감추기 위해 남편을 더 닦달해대는 ‘순악질 여사’다. 수일은 잿밥에 혹해서 안 어울리는 염불을 외느라 진땀깨나 흘리는 의뭉 캐릭터다.
해학과 풍자의 대상에는 노동집회 현장도 포함된다. 천편일률적인 구호와 지루한 연설, 조합원 참여율을 높이려는 선물공세와 읍소까지…. 집회에 참석한 노동자들은 연설은 듣지도 않고 성인잡지를 읽거나 주식시세 파악에 바쁘다.
이 연극의 미덕은 이런 섬세한 자기풍자 능력에서 나온다. 작가이자 연출가인 오세혁은 극중 노조간부로 직접 출연하면서 “야, 이 연극은 진도가 왜 이렇게 빨라” “이야, 불과 5분 사이에 노동자의식이 급성장하였구나”라는 애드리브성 대사로 관객의 웃음을 끌어낸다.
지난해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젊은연출가전에서 대상과 연출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올해 그 부상으로 90석 게릴라극장에서 2주간 공연을 펼치며 ‘감동후불제’를 실시했다. 상업극이 범람한다는 대학로에서 입소문만으로 2주 만에 1200명이 넘는 관객과 2000만 원 가까운 관람료를 걷어 들였다. 대학로 연극, 아직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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