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아 또는 메데이아는 그리스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자 중 ‘가장 센 여자’다. 요즘 말로는 팜 파탈, 옛날식으로 독부(毒婦)란 표현만으론 그를 온전히 묘사할 수 없다.
고대 조지아(옛 그루지야) 서부 콜키스 왕국의 공주였던 그는 사랑하는 남자 이아손을 위해 부왕과 조국을 버렸고 남동생까지 죽인다. 또 남편이 된 이아손을 위해 그 정적인 펠리아스를 소름끼치는 방식으로 살해한다. ‘사랑밖에 난 몰라’만 부를 것 같은 이 여인의 범죄행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망명지 코린토스에서 남편 이아손이 자신을 버리고 크레온 왕의 딸과 정략결혼을 하려 하자 크레온 왕과 딸을 독살했을 뿐 아니라 이아손과 사이에 난 두 아들마저 살해한다. 이쯤 되면 한국 고대설화 속 낙랑공주, 평강공주, 신라의 미실까지 합쳐 놓는다 해도 당할 재간이 없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작가 중 가장 막내인 에우리피데스는 이 메디아가 맹목적 사랑의 종지부를 찍은 코린토스에서의 비극을 극화했다. 보통의 범부(凡夫)들은 그런 메디아를 지상 최악의 악녀로 그리기에 급급했겠지만 에우리피데스는 달랐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줬던 남자에게 배신당한 여인의 복수심에도 상당한 정당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남성우월주의와 유럽중심주의가 팽배한 중세와 근대에 들면서 메디아는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어야 할 존재로 철저히 재구성됐다. 그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지녔다고 해도 그것은 이아손으로 대표되는 영웅적 남성을 파멸시킬 운명을 타고난 요부(妖婦)에 대한 경계어린 연민에 불과했다. 메디아를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저항과 교란의 상징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현대에 들어서다.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메디아 온 미디어’(김현탁 재구성·연출)는 이런 페미니즘의 시각마저 해체한다. 연극은 모두 10개 마당으로 구성됐다.
첫 마당은 이아손의 결별 통보를 받은 메디아(김미옥)의 기자회견 장면이다. 맹목적 사랑의 희생양을 자처하는 메디아는 철저히 연출된 눈물과 대사로 관객의 동정을 호소한다. 그런 가운데도 고가 브랜드의 의상과 액세서리를 걸치고 제법 세련된 말을 늘어놓지만 얼토당토않은 말로 ‘삑사리’를 내기도 한다.
둘째 마당은 신파영화 장면이다. 코러스들이 스프레이로 가짜 비를 뿌리는 동안 스카프를 두르고 우산을 쓴 메디아는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이진성)으로부터 야멸친 추방명령을 통보받고 눈물의 애원을 펼친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민할 24시간의 시간만 달라고.
셋째 마당은 TV 토크쇼 현장이다. 둘째 마당에서 애처롭기 그지없던 메디아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표범처럼 돌변해 자신의 선택이 가족 모두를 위한 것임을 강변하는 남편 이아손(염순식)을 몰아붙인다. 연적인 크레온의 딸 글로체(연해성)와 이종격투기 한판도 불사한다. 코러스는 그동안 이런 선정적 감정의 분출을 한껏 조장하는 무대담당과 과장된 리액션을 펼치는 방청객이 되어 연신 관객을 선동한다.
연극은 이런 식으로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다양한 대중매체 속에 메디아의 이미지를 투영한다. 정해진 동작만 반복하는 롤플레잉 게임, 야릇한 탄성을 내지르는 성인비디오, 실시간 댓글에 반응하는 인터넷 시사프로그램, 앳된 목소리로 너무도 뻔한 대사만 읊어대는 애니메이션 더빙, 여성 킬러가 맹활약하는 액션영화, 출연자들이 한 명씩 인사를 하면서 엔딩 노래를 다함께 부르는 성인가요 프로그램…. 관객은 수천 년 전의 비극을 너무도 익숙한 장면 속에 분할 삽입한 뒤 퍼즐 맞추듯 조합해낸 연출 솜씨와 배우들의 변신 모습에 경탄하면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일상적 미디어의 그물망에 포착된 메디아가 환기시키는 효과는 무얼까. 너무도 끔찍하고 선정적이라고 여겼던 고대의 비극이 지금 여기서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아니 더 자극적인 방식으로 조장되고 있다는 섬뜩한 깨달음이다. 또한 무의식적 기피의 대상이었던 메디아에게 너무도 현대적인 우리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음을 소스라치게 놀라며 발견하게 만드는 것이다.
: : i : : 2일까지 서울 대학로 게릴라 극장. 1만5000∼2만5000원. 02-763-1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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